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중편선> 유혹 (下)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7-11-25 11:40:26   조회: 219   
* * *

“지금부터 야구단 단장인지…… 사장인지…… 그리고 막강하다는 프론트에 관해 이야기해보게.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지? 일요일 판 신문에서 그에 관해서 특집기사를 읽은 적 있었거든.”
“그건 감독의 역할과도 겹치는 데요…… 숨은 선수를 찾아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영입해 키우고 성과를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값비싼 선수를 데려와서 한다면 누가 못하겠어요?
선수를 고를 때 야구에 대한 기본 실력은 물론이고, 야구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어떤 선수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동료 선수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태도를 살펴보고,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는지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선수가 아닌 인간을 스카우트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 수많은 선수들 중에는 본받을 만한 훌륭한 선수가 있었을 것 아닌가?”
“저는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최고의 타자도 타율이 3할 대를 넘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에 일곱은 실패한다는 말이지요. 야구는 실패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지요.”
“선수 중에는 거만한 선수가…… 그러니까 저만 잘난 척 하는 선수도 없지 않을 텐데?”
“저는 잘난 척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믿어주세요. 팀의 균형을 깨는 선수는 스타 플레이어라도 언제든지 내보내야 합니다. 몇몇 스타를 통한 경기 운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도록 팀 자체를 단합시키는 것이 중요하지요.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입니다. 통계적으로, 수학적으로 분석해 선수의 재능을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자료를 가지고 선수의 기량을 끌어올리거나 부상을 방지하는데 활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말입니다…… 선수의 성적이 극도로 부진할 경우와 가장 좋았던 경우를 엄밀하게 비교해서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모든 스포츠는 멘탈 게임이 아닌가? 특히 야구가 심하지. 그래서 야구에는 징크스도 많던데?”
“정말 그렇습니다. 스포츠는 인간이 하는 멘탈 게임이기 때문에 징크스나 저주가 많은 것이겠지요. 그걸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깨지지 않는 징크스는 없겠지요.”
“술을 좋아하나? 가끔 언짢은 기분을 풀려면 그게 최고일 텐데. 나는 젊은 시절부터 너무 많이 마셨다네. 그 힘으로 버티고 살고 있지……”
“변호사님이…… 선수들도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시긴 해요. 하지만 전 술이 몸을 망친다고 생각해서 많이는 마시지 않아요.”
“그렇구만…… 언젠가 감독을 해보시지. 잘할 것 같은데……”
“감독 한 번 하는 게 꿈이었지요. 감독이 아무리 파리 목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지요. 끝났다니까요. 끝났…… 영구 제명이 된 거라고요.”
“내가 눈치 없이 말을 잘못 꺼냈구만.”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네요.”
“인간이 꾸는 꿈은 모두 개꿈이라네.”
“글쎄 말입니다.”
“그래도 말이지…… 그 사정을 알고 싶었다네. 어떤 감독과는 불화설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감독은 그 후 성적 부진으로 쫓겨났지만…… 헛소문이었던가, 아니면 실제 그랬었던가?”
“그 감독과는 애증의 관계였죠. 심정적으로는 서로 맞지 않았어요. 어쩐지…… 너무 심하게 엄격했어요. 그래서 저는 쓸데없이 반항하고 싶었던 거지요. 한 번은 찾아가서 노골적으로 트레이드를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마구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더군요.
그렇지만 언론은 과장을 너무 좋아하니까 터무니없는 소설을 썼지요.”
“그래도 한 팀에 있으면서 그러면 괴로운 일일 텐데.”
“매우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그건, 대부분 감독이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분명히…… 그 감독은 까탈스러웠지요. 너무 지독했어요.”
“뭐가 있었지?”
“제가 지금부터 감독을 까발려야 하겠군요. 진실을 말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그 감독은 규율을 무척 강조했습니다. 운동장 밖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등 생활이 흐트러지면 운동장 안에서도 플레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격하게 통제한 것입니다.
그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을 혹사했습니다. 너무 심했지요. 그것도 팀 성적을 올려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랬단 말입니다. 감독은 선수에게 맞춰서 가르쳐줘야 하는데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고 자기 것만 가르치니까 오히려 선수에게는 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선수들이 아프다고 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꾀병으로 간주하고 더 다그쳤습니다. 실제 아프면 무조건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밖에서 아는 것하고는 영 딴 판이구만.”
“그렇겠지요. 밖에서 어떻게 그런 내막을 알 수 있었겠어요?
자기가 유명한 투수 출신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자신이 제일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했지요. 한마디로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랬으니 구단 운영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고…… 프런트와는 끊임없이 충돌했지요.”
“세상 어디에나 자기중심적이고 과대망상적인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훌륭한 선수가 훌륭한 감독이 되라는 법은 없는 걸세. 어떤 종목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 스타일의 감독을 생각하고 있었나?”
“저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전 정지가 되니까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지요. 그래서 선수 생활이 끝나더라도 야구를 떠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단계적으로 계속 올라가서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감독은 선수들을 공평하게 대하려고 해야지, 똑같이 대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선수가 성격과 특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지요. 좀 더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야 그제서야 움직이는 선수가 있고 칭찬을 하고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지도해야 통하는 스타일이 있지요. 선수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감독은 선수들과 정말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하지요. 그때는 친형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야구장에 나오는 게 즐거워야 하지 않겠어요? 연습하고 경기하는 게 가슴 설레이도록 기다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선수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비록 지독하게 통제를 해도 말입니다. 실제 선수들 간에 사이가 항상 가깝고 좋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30여명의 코칭 스텝과 100여 명의 선수가 다 제각각 개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지만 함께 팀으로 나서면 코치나 선수들 모두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감독이라면 이렇게 상호간 존중과 배려를 이끌어내야 하지요.”
“감독에게는 그런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하겠군.”
“그런데 감독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지요. 미국식 프런트가 등장하면서 실제 권한은 프런트가 쥐고 있어요. 그러니까 감독은 프런트로부터 견제를 받고, 그리고 요즘 너무나 야구 상식이 풍부한 열성 팬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고 있지요.
팀 성적이 나쁘면 괜스레 감독을 타깃으로 해서 분풀이를 하는 거죠. 팀이 연패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 감독은 온라인에서 거의 뭇매를 맞는 거지요.
이때 프런트의 책임은 쏙 빠져버리지요. 밖에서는 프런트와 감독 간 알력이나 대립은 알 턱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감독 연봉의 절반은 욕먹는 값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뭐더라…… 그렇지 않은가…… 넥센이라고 있지? 그 팀 감독이…… 누구였는데?”
“염 감독님 말씀인가요?”
“그렇지. 이제 기억이 나는 군.”
“훌륭한 감독님이죠. 맨날 꼴찌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지 않았습니까.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아버지가 훌륭한 변호사였거든. 훌륭한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만드는 거지. 나는 그렇지 않네만……”
“왜 그 감독님을?”
“갑자기 생각이 났다네. 그 친구 선수시절은 별로였던 모양이야. 선수 생명이 짧았어. 그러고 나서 닥치는 대로 프로팀의 운영팀장도 하고 작전코치와 주루코치, 수비코치도 했던 모양이야.
그러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겼다는 거야. 그리고 야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지.
내가 무슨 신문에 난 인터뷰 기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네.”
“저에게도 진정한 꿈이 있었지요. 버려진 이름 없는 선수들을 데려다가 훌륭하게 키워내는 것이죠. 그들의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었지요. 모두 함께 노력해서 꿈을 이룬단 말입니다.
……그때 약물 파동으로 징계를 당하고 돌아왔을 때 감독님의 따뜻한 격려가 잊혀지지 않는 군요. 저도 그런 감독이 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
“……”
변호사가 멍한 눈으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날따라 작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어 보였다. 하늘은 금세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회색 구름으로 덮여있다. 손목시계를 본다. 그리고 낡은 접이식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난 야구 이야기가 재미있으니까 자주 올 수 있다네. 택시가 올 시간이지. 자네한테는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는 이놈의 날씨 때문에 술에 취하고 싶다네.
나는 알코올 의존증이지. 아직 중독까지는 안 갔을 거야. 내 좁은 사무실에는 값싼 양주병이 여러 개 있지. 독한 술이 좋은 거야. 이유 없이 홀짝 거린다네.
그러니까 울적한 기분이 들면…… 술잔을 들고 길게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는 거지. 그러면 머리끝까지 곤두서는 싸늘한 기분이 든다네.
지금 당장은 밖에 나가서 담배를 빨고 싶지.”

* * *

테스토스테론은 남자를 남자답게 만드는 호르몬이다. 울퉁불퉁한 근육, 거뭇거뭇한 수염을 만든다. 1935년부터 테스토스테론 유사체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다량으로 만들어졌다. 혈압, 신장, 당뇨 치료제로 쓰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의료용이었지만 멀쩡한 사람이 이 주사를 맞으면 근육이 늘어나고 힘이 강해졌다. 그래서 스테로이드가 선수들 사이에 마법의 주사로 은밀하게 돌기 시작한 것이다.
몇 주간 스테로이드를 주사로 맞거나 약으로 먹으면 근육이 증가하고 힘이 늘어난다.
최근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도핑약은 두뇌 도핑에 사용되는 도파민과 노니페린으로 두뇌 호르몬이다. 이 주사 한 방이면 근육은 탄탄해지고 손발은 민첩해진다. 그리고 혈액 도핑은 근육에 산소를 더 공급하게 한다. 산소가 더 많아지면 더 빨리, 더 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 수혈로 산소 운반 적혈구를 늘린다. 타인이나 자기 피를 몇 주 전에 뽑아 놨다가 시합 바로 전날 맞는다.
그러나 심근경색, 뇌졸중, 간종양, 무월경이라는 부작용이 있다.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는 근육을 빠르게 생성하고 골밀도를 늘리는 데 최적화된 약물이다. 자율신경계와 손, 발 등을 비대화시키고 생식기를 이상하게 변하게 한다. 어깨와 등에 여드름 증세, 탈모, 고환이 축소되면서 정자수가 급격히 떨어지는 심각한 약물 후유증을 겪는다.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는 신체 모든 세포에 침투해 원래 체내에 유지되던 각종 호르몬과 세포 균형을 전부 깨기 때문에 중독이 되면 뇌뿐만 아니라 간, 콩팥, 전립샘 등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이 약물은 단백질 합성을 촉진해 근육을 빨리 만들어주기 때문에 효과가 탁월한 만큼 부작용의 범위가 큰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밝혀지지 않은 부작용도 많다.
도핑검사는 소변, 혈액 속의 흔적 물질을 찾는다.
방해 도핑은 도핑 약물이 검출되지 않도록 방해 물질을 주사하는 것이다. 교묘하게 도핑을 감추겠다는 것이다. 이뇨제로 소변량을 늘리고 수혈 보조제로 혈액 수분을 늘린다. 소변, 혈액이 희석되면서 도핑 약물 검출이 어려워진다. 숨기려는 도핑과 찾으려는 반도핑이 숨 가쁘게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다가 중독성이 강한 그 약을 멀리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침에 잠이 깨면 다시 약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단증세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는 50경기를 뛰지 못한다. 사실상 시즌 아웃이 되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구단에도 제재금 1억 원을 물렸다. 한국야구위원회가 주관했던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에 양성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화작용이 있는 남성 호르몬 스테로이드 계열 약은 세계반도핑기구가 지정한 제1종 상시 금지 약물에 속한다.
한국야구위원회는 등록 선수 중 구단별로 5명씩 총 50명의 선수를 대상으로 표적 검사를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도핑컨트롤센터의 분석 결과 그를 제외한 49명은 음성 판정을 받았다.

* * *

“지금은 사정이 이렇게 변했네만…… 운동장에서 수많은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포효하던 때가 엊그제 같을 텐데 정말 답답하지. 그런데 그때 은퇴를 생각하지 않았나? 팀 동료나 후배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차라리 잘 됐을 텐데…… 너무 때늦은 후회가 되겠지?”
“그때는 아직 물러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말입니다. 지금 당장 유니폼을 벗기엔 너무 아쉬운 게 많았습니다.
언젠가 야구를 그만둘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한창일 때 그 좋았던 공이 왜 안 나오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요. 선수는 운동장에서 제일 행복한 거라고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일이 계속적으로 꼬이기 시작했었지 않습니까? 훈련을 정말 성실하게 했는데 직구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투구 폼도 알게 모르게 흐트러졌지요. 그러니까 약물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오랫동안 그렇게 야구를 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폼이 흐트러진단 말인가? 그 폼은 빳빳하게 굳어 있을 거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슬럼프가 찾아오면 그렇게 된답니다. 인간의 동작은 기계가 아니거든요.
한 번 투구 폼이 망가지면 정말 말썽이지요. 그건 타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나쁜 폼을 가지고 하면 아무리 연습을 해도 더 나빠져요. 그런데 마음이 급하니까 이것저것 폼을 바꾸면 더 나빠져요. 자기한테 맞는 것으로 쭉 나가야만 하는데.”
“만약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고 하고…… 그러니까 나이가 들면 후배들의 눈초리가 따갑지 않을까? 거 왜 있지 않은가? 유명한 탤런트나 한창 잘나가던 가수들도 때가 있는 법이고, 언젠가는 한물가고 뒤로 밀리니까 말이야.”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면 경기력이 조금씩 쳐지니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후배들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나갈 입장은 아니지요. 후배들은 오직 실력으로 선배를 밀어내야만 하지요.
후배들은 이걸 알아야 해요. 선배들이 오래 있어줘야 자신들도 오래 있을 수 있는 거다.
선배가 그런 식으로 빨리 나가면 그 후배들도 언젠가 똑같이 밀려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선배들이 굳건히 버티는 것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야구 선수 중에 친한 친구가 있는가? 또는 야구선수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우리는 고등학교시절 야구 때문에 행복했지요. 저에 대해 나쁜 소식이 돌면 그 친구가 바로 연락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저는 투수이고 그는 포수였거든요. 우리는 그때 맨날 붙어살면서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냈어요.
그러나 머리가 좋아서인지 학교 졸업하고 삼수를 해서 명문 대학으로 진학했어요. 그는 나중에 은행원이 되었어요.
저는 바로 프로팀의 연습생으로 갔구요. 체육 특기생으로 오라는 대학은 몇 군데 있었습니다. 대학 가봤자 어차피 공부는 안할 텐데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그리고 할머니만 계시니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나쁜 소식이 들리면 사실이냐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하지만 저는 냉정하게 네가 뭘 안다고, 겨우 은행원이나 하는 주제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그와는 결국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지요. 그의 마지막 잔소리가…… 잔소리가 아니라 훌륭한 충고였는데……
‘야구는 핀치에 몰리면 대타나 구원이 있는데 인생엔 그런 게 없다.’고 하더군요.”
“인생에 대타나 구원이 없다는 말이지? 인생은 쓸데없이 길다네.”
“그런데…… 변호사님의 경우는 어때요?”
“난들 별 수 있나. 보시다시피 내 나이가 꽤 되었지. 대머리에다 몇 가닥 남은 흰머리 보게.”
“저도 알고 있어요. 옛날에 판검사 하면서 떵떵거렸을 거고 변호사해서 돈도 많이 벌었을 거 아녜요?”
“내가 떵떵거렸다고…… 겨우 말석으로 합격해서 시골에서 바로 개업을 했다네. 사실대로 말하면…… 젊었을 때니까 떵떵거리고 싶었었지. 하지만 아버지가 옛날에 부역을 해서 임관될 수 없었지.
그리고 장사가 잘 안 되니까 여기저기 옮겨 다녔어. 오죽하면 이 나이에 국선을 하고 있겠나. 이게 내 밥줄이라네.”
“설마……”
“가끔 울고 싶어질텐데. 안 그런가?”
“벌써 그랬지요. 지금은 무덤덤합니다. 시간이 약이지요.
정말 많이 울었던 때가 있었긴 합니다. 출전 정지가 풀리면서 처음 나간 재기전을 잊을 수가 없지요. 데뷔 전이나 트레이드 되고 난 후 첫 출전 때보다 더 그랬어요. 엄청 긴장했거든요. 그래서 투구 내용이 안 좋았어요.
그날 경기가 끝나고 나서 남자 화장실은 북적거리니까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서 혼자 엉엉 울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요. 그렇게 눈물이 많이 흐르더라고요.”
“다시 생각해보면…… 그 도박 말일세…… 자네는 돈에 대한 욕심이나 무슨 비틀어진 속물근성 때문이 아니라…… 그때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으니까 손을 댔는데…… 그만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드는 군.”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물은 약물이고. 도박만 안 했어도 제 운명은 달라졌겠지요.”
“그놈들은 꽤 잘 짜여진 관료주의적인 조직체였어. 그 브로커 역시 중간 두목급에 불과한 거야. 그들이 자네를 상대로 게임을 벌였단 말이지. 그 게임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었네. 결국 그 게임에서 졸 역할을 한 거야.”
“그 졸이라는 게 다름 아니라 미끼였단 말이군요. 어리석게도 미끼였다구요.”
“인간들이 기대하는 최선이란 게 바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인데 말이야. 하지만 희생자가 되고 말았네.”
“그만 하세요…… 그만 두라고요…… 제가 스스로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으니까요……”
“그럴 테지. 진정하시게. 나도 그런 적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네. 왜 없었겠는가. 자업자득이지.
내가 이 모양이니 친구들이 없다네. 늙게 되면 사람들과 어울리고 관계를 맺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지.
자신을 보호하고…… 그러니까 신경질적인 노인이 안 되려면 외부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아주 단순화시켜야만 하는 거라네.
요즈음 매일 혼자서 술 마시는 게 무척 고역이지만…… 그래도 술이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 * *

성민경은 마카오에서 각각 수억 원대의 원정도박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었다. 경찰은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금융계좌를 추적했다. 1년 치 자금 흐름을 조사한 것이다.
그는 예전에도 가끔 프로야구 시즌이 끝나면 동계 훈련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마카오로 가서 슬롯머신을 하거나 블랙잭을 했었다. 그때는 작은 돈으로 했고 돈을 잃기도 하고 약간 따기도 했다.
물론 일부 선수들은 전지훈련 중에는 물론이고 시즌 중에도 경기가 끝난 뒤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많게는 수천만 원씩 베팅을 해서 불법 도박을 해왔다.
그는 수사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카오 현지 카지노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직폭력배들에게 도박자금을 빌린 뒤 한국에 들어와 돈을 갚는 방법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조폭들은 그에게 도박자금을 빌려주고 숙박, 항공, 차량, 환전 등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 마카오 현지에서 도박 자금을 빌려줄 땐 나중에 발뺌하지 못하도록 동영상을 찍었다.
그는 조폭들이 마카오 현지에서 운영하는 정킷방을 이용한 것이다. 정킷방은 VIP를 위한 일종의 도박방으로 규모에 따라 1년에 70억~150억 원의 보증금을 내면 카지노에서 임대받아 정킷방을 운영할 수 있다. 정킷방은 판돈의 일부를 정킷방 업주가 챙기는 ‘캐주얼 정킷’과 고객이 잃은 돈의 일정 부분을 카지노에서 받는 ‘셰어 정킷’으로 나뉜다. 카지노와 정킷방 업주는 고객이 게임에 참여해 이긴 금액은 반반씩 부담하고, 잃은 금액은 일정한 비율로 나눠 갖는다. VIP룸에서는 90퍼센트 이상 ‘바카라’라는 카드게임을 한다. 바카라는 단숨에 승부가 나고 회전율이 빨라 딜러나 업주, 게임 참여자 모두 선호한다.
호텔은 세련된 반달형의 하얀 건물이었다. 그 호텔 어딘가에 특별한 고객들만 들어갈 수 있는 정킷방이 숨어 있었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마다 육중한 붉은색 벨벳 커튼이 연극 무대의 막처럼 드리워져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박에 열중하기 위해서 시계가 보이지 않는 방.
어두운 욕망과 흥분과 열정과 소리 없는 탄식이 교차하는 방.
경찰은 최근 해외 원정도박 기업인과 도박을 알선한 조폭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성민경이 도박을 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 브로커는 마카오에서 귀국하면서 인천공항에서 꼼짝없이 체포됐다. 경찰은 그의 휴대전화에서 동영상과 문자메시지 등을 복원해서 수사 단서로 활용했다. 그는 두목급으로 단순한 브로커가 아니었다.
그는 카지노의 거물 에이전트였고 불법 스포츠 도박에도 관여한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고액의 수수료를 받으며 환치기라고 하는 불법 환전을 통해 국내 유력 인사들의 검은 돈을 세탁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한국에서 환전 브로커에게 현금을 건네면 해외 환전상이 현지에서 이를 달러 등으로 바꿔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환치기로 만든 검은 돈을 카지노에 넣어 두면 이자는 없지만 거래 명세나 환전 사실 등이 적발될 위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치자의 신분 또한 확실하게 비밀 보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카오 도박장은 아주 안전한 금고인 것이다.
그러나 불법 스포츠 도박이건 환치기이건 현금화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대포 통장을 이용한 자금 세탁을 거쳐야 하니까 문어발식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부 조직으로 조직폭력배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대포 통장을 모으는 모집책과 은행에서 자금을 인출하는 인출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끔 협박과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도 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필로폰이나 엑스터시를 공급해야 하는 경우에는 마약 조직이 있어야 하고, 요즈음 도박 사이트 별로 회원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보니까 가끔 경쟁사 홈페이지에 과부하가 걸리게 해서 마비시켜야 하므로 이때는 디도스 공격을 담당하는 해커 조직도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각 파트마다 자체 구성원과 책임자급 두목이 있었고 서로 완전히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전체 조직을 아우르고 지휘 총괄하는 회장님과 극소수의 그 측근들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여러 개의 가명을 썼고 수십 개의 대포폰을 이용했으며, 그나마 기록이 남는 전화통화는 가끔 했을 뿐이고 주로 암호화된 문자를 모바일 메신저로 주고받았다.
그들은 정킷방이 있는 호텔의 스위트룸에 간이 사무실을 차리고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 브로커가 경찰에서 진술했다.
“저는 10년 넘게 마카오 카지노에서 에이전트로 일했습니다. 중견기업 대표, 유명 연예인, 스타급 야구선수 등 고객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장부를 부하들을 시켜 관리했지요. 특히 현지에서 도박 빚을 빌려줄 때는…… 그걸 일명 빽이라고 하는데요…… 꼼짝달싹 못하게 차용증에 지장을 찍게 하고 동영상까지 촬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객이 돈을 잃어야만 정킷방 운영자와 에이전트가 돈을 버는 것은 아닙니다. 고객이 돈을 따서 계속 칩을 교환해야 수수료를 따 먹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고객은 결국 다 잃게 됩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도박 자금을 탕진하고 현지에서 빽까지 쓰게 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조폭의 빚 독촉과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 야구선수는 모아놓은 돈 다 털리고. 본전 생각 때문에 점점 크게 덤벼들었지요. 그랬으니 도박 빚이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지요. 마침내 도박의 함정에 빠진 거예요. 누적 도박 빚이 5억인지 그 이상인지 될 거예요. 당장은 감당할 수 없는 돈이겠지요. 그러니까 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승부조작을 하라고 협박한 것이죠. 불법 스포츠 도박에서는 이리저리 잘 엮어서 승부조작에 성공하면 아주 쉽게 10억 이상도 벌 수 있거든요. 틀림없어요.
그런데 몇 번이나 실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과정은 따지지 않고 오직 결과만 봅니다.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지요. 그랬으니 그쪽 조폭들이 아주 심하게 했겠지요.
물론 저하고는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전 에이전트에 불과하고 환치기 전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그쪽에 알아봐야 할 거예요.
한국에서 오는 VIP들은 대부분 전문 모집인을 통해 옵니다. 전문 모집인들은 국내 카지노나 골프장, 유흥주점 등에서 대상을 물색하지요. 국내 도박 관련 커뮤니티 등에도 많은 홍보 글을 남깁니다. 그러니까 인터넷에 올라오는 해외 원정 후기의 10퍼센트 정도만 어쩌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돈을 얼마 땄다는 글은 대부분 미끼용 홍보글입니다. 이렇게 모집한 고객이 게임에 참여할 때마다 쓰는 게임비의 통상 몇 퍼센트는 수수료로 정킷방에서 전문 모집인에게 지급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민경은 출장정지를 당하니까 약간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겠지요. 인터넷을 보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불과 몇 달 동안 도박에 빠져서 그렇게 된 거예요.”

* * *

변호사는 그날따라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있는 교도소 특유의 역겨운 냄새가 느껴졌다. 검정색과 흰색의 사각 리놀륨이 깔려 있는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안경을 만지작거렸고 가끔 벗었다가 다시 쓰곤 했다.
“도박 빚 때문에? 돈에 몹시 쪼들리고 있었으니까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겠지. 나도 그 지경이면 그랬을 거라고.”
“재기에 성공하고 있었어요. 선발 출장도 보장되었구요. 그런데 느닷없이 연락이 온 거예요. 그걸 잘 처리해주면 빚을 깨끗이 없애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매 건마다 충분히 보상을 해준다고 했어요. 결코 섭섭하지 않게 말이지요.”
“걔들한테 죽도록 얻어맞지는 않았나? 말 안 듣는다고. 그것들은 남을 죽도록 때리고 싶어서 좀이 쑤실 텐데.”
“솔직히 귀가 솔깃했지요. 빚도 없어지고 게다가 목돈도 쥘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흔쾌히 응했어요. 그러니 절대로 때릴 이유가 없었지요. 조건이 좋았어요. 채무면제 합의서도 받았고…… 선금도 두둑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신사적으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투수를 포섭하라는 지시는 안 받았나?”
“당연히 받았지요. 하지만 제가 먼저 시작하고 성공하면 그때부터 친한 동료들을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몇몇하고는 이심전심으로 이미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 유혹에 넘어갔고…… 나중에는 심한 협박을 받았고…… 후배를 끌어들이려고 시도했고…… 그걸 검찰에서 순순히 이미 진술했단 말이지?”
“그렇게 되었지요.”
“자유계약 선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제가 투수 아닙니까. 투수는 타자와는 대우가 다르지요. 제가 재기에 성공했단 말입니다. 4년에 40억, 50억이 가능했겠지요.”
“좌우지간 안 됐구먼.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으니……”
“…… 잘 모르겠습니다.”
“선수 생명이 끝나면서 괴로웠겠지…… 그렇지 않나? 술 꽤나 마셨겠군. 그럴 때는 알코올이 해결책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지요. 죽을 것처럼 마셨어요. 그런데 아무리 들이부어도 술이 취하지가 않는 거예요. 뻗어버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그러니까…… 그렇게 망가지게 되면…… 이왕지사 약에 손을 댔다면…… 마약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요즘은 좋은 게 많을 텐데…… 쉽게 구할 수도 있고……”
야구선수가 거북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정신적으로 무너지니까 유혹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것만은 차마……”
“나도 한때는 강한 유혹을 받았었지. 단골로 만나는 여자가 있었거든. 그 여자도 나이가 드니까 별 수 없이 은퇴했다네. 아주 오랜 옛날 일이구만.”
“약물의 유혹은 뿌리칠 수가…… 슬럼프라든가…… 스트레스라든가…… 그것도 미국 선수들이 먹었던 약효가 매우 강한 것으로 먹었지요. 빨리 효과를 보고 싶어서…… 과다 복용했어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호사는 외면했고 누렇게 색이 바랜 천장을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변호사가 말했다.
“그렇게 되었구만. 모든 약물은 어떤 면에서 독약이고 마약이라고 할 수 있다네. 반드시 부작용이 있거든. 그래서 약은 조심해야 한다네.”
“그 약도 부작용이 심했지요. 그리고 금단증세도 있었어요. 복용을 중단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니까 극심한 신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되지요.
그래서 불안, 불면, 두통, 귀울림, 극도의 우울감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직 발작이나 경련, 환각, 망상까지는 가지 않았지요.”
그는 우울하고 창백한 얼굴이었고 목소리는 다소 쉬어 있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셔츠가 땀으로 축축했으니 가슴과 등쪽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우린 야구 이야기만 했네요. 재판은 어떻게 될까요?”
“야구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네. 궁금증이 많이 풀렸거든.”
“재판 말입니다? 재판 날짜가? 요즘은 밤마다 나쁜 꿈만 꾸니까 온종일 뒤숭숭해요.”
그때는 매일 새벽이면 얕은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어김없이 나쁜 꿈을 꿨다.
그들이 검찰청 건물 정문의 포토라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몰려든 것은 아니었다 몇몇 얼굴을 잘 아는 야구 전문 기자들이었다 사진기의 찰칵 소리가 반복해서 터진다 고개를 들라고 고개 좀 이쪽으로 이쪽이야 개미만한 수많은 이들이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 다니며 귓속으로 콧속으로 헤벌린 입속으로 기어들어갔고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 먹었다 그의 손을 떠난 공은 하늘로 높이 올라가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심판은 가차 없이 볼 판정을 내렸고 관중들은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야유를 보냈다 투수 코치가 올라왔다 그런데 코치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판사라고 했다 그는 마구 날뛰며 화를 냈고 심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디찬 금속성 수갑이 손목을 죄어왔다 여자는 완전 나체였다 마른 상체에 봉긋한 가슴 흑갈색 유두 빈약해보이지만 의외로 풍만한 엉덩이 역 이등변 삼각형 형태 속의 무성한 거웃 살결이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잘 아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여자 검사였다 그러나 그를 향해 히스테릭하게 비웃었다 그래도 그는 여자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일어섰다 육체는 스스로 알아서 반응을 했던 것이다 그는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발을 질질 끌면서 미로 같은 길을 맹목적으로 끝없이 걸었다 벗어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온몸을 더듬어 보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고 깨진 머리에서는 피까지 흘렀다 칼에 찔린 듯한 예리한 통증이 머리에서부터 발바닥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무더운 여름날 개처럼 숨을 헐떡였고 연거푸 신음을 내뱉었다 더 이상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그 사람들이 날 끝까지 놓아주질 않을 거라고 누운 자세에서 침대 위 창문을 올려다보았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창문가로 올라갔다 그가 월셋방으로 얻은 임시 거처는 지하철 강남역 1번 출구 근처 20층 원룸의 5층이었다 그가 창문의 방충망을 위로 젖히고 뛰어내리면서 밖으로 뻥 뚫린 창틀을 붙잡고 위태롭게 매달렸고 병신 새끼! 뛰어내려봐! 손을 놓으라고! 남자들이 외쳤다.
꿈이 깨면서 겨우 잠든 새벽잠에서 깨어났다.
사기전과 9범인 남자가 앉아있는 똥통으로부터 역겨운 똥 냄새와 희미한 정액 냄새와 소독약 냄새와 감방 냄새가 뒤섞여 확 풍겨왔다.
늙고 꾀죄죄한 변호사는 담배 진으로 누렇게 변한 이빨을 드러내며 애매하게 웃었다.
“법적 관점에서 검토해 보겠네. 생각 나름이지만 별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해. 도박이 합법적인 나라도 많지. 그것도 선진국에서 말이야. 외국환거래법 위반도 그렇지 뭐, 벌금으로 끝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도박빚은 법률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거야.
그런데 승부조작이 문제야. 물론 실패로 끝나긴 했지. 피고인은 협박과 공갈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공모 부분을 빼는 게 너무 늦었다는 거지.”
“그걸 빼는 게 변호사님의 역할 아닌가요?”
변호사가 신경질을 냈다. 무뚝뚝하고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변론에 큰 기대를 하지 말게. 국선이 뭘 어떻게 하겠나? 그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잘 살펴봐 주십시오, 라고 말할 걸세.”
“제가 뭘…… 죽을 죄를 지었다구요?”
“그러면? 검찰에서 다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브로커인지 뭔지가 진술도 했더구먼.”
“여자 검사가 친절했지요. 그냥 믿음이 갔어요. 꼬박 이틀 간 조사를 받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좌우간 다 이야기 했지요.”
그녀는 마른 체구에 단순하면서도 촌티나는 우중충한 검은색인지 또는 회색 옷을 입고 검정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조사가 끝날 무렵 우울하게 말했다. “나로선 어쩔 수 없다고…… 재판이나 잘 받으세요.”
“검사가 예뻤던가…… 검찰이 미인계도 쓰는 모양이지. 검사가 범죄사실에 대해 세심하게 조서를 잘 꾸미긴 했더구먼. 그런데 검사가 야구에 대해서 뭘 알고 있긴 했어? 그 부분이 좀 미심쩍었거든. 야구 용어도 부정확하게 사용하고 말이지……”
변호사는 수사기록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면서 노란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관련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야구선수는 그 동작 하나하나를 눈으로 쫓으며 거기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적혀있는지 새삼스럽게 궁금했다. 문장은 끊기고 이어졌지만 투명했고 단단했다. 자신이 진술한 그대로라고 하지만……
그때 (그녀가 말할 때마다 볼우물이 들어갔고, 꿈속에서 두 사람의 팔다리가 한없이 부드럽게 뒤얽혔던) 그 예쁜 여자는 아주 날렵한 솜씨로 유영하듯 능숙하게 글자판을 두들겼었다.
“…… 아니요. 전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지요.”
“그렇다면…… 자넨 승부조작 부분에서 볼 배합하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진술할 수도 있었는데…… 다시 말하면, 야구의 기술적인 부분이니까 실제 조작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단 말이지.
미수범도 원칙적으로 처벌되긴 하지만 정상 참작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었는데…… 그만 실토하고 말았구만. 너무나도…… 진실인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게…… 상세하게 진술했단 말일세.”
“……”
“거짓말을 해 본적이 있었던가? 가끔 거짓말하면 기분이 후련해지거든.”
“글쎄요. 오직 야구만 했으니…… 사회생활을 많이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거짓말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겠군. 밑바닥 생활을 하려면 거짓말도 가끔 해야 될 거야.”
“그렇지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저 자신을 죽인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구요. 승부조작도 모두 실패로 끝났어요. 승패와 관계가 없었단 말입니다. 제가 죽어야할 만큼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하나요?”
“그 애송이 판사는……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애송이지. 제 잘난 맛에…… 천방지축 철없이 까분다네.”
“판사들한테 심한 알레르기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네. 그렇고말고.”
야구선수는 당황했고 낙심한 표정으로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나갈 수가 없단 말인가요?”
“글쎄…… 집행유예가…… 설마…… 장담할 수는 없다네.”
“저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앞으로……?”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너무 일찍 인생의 험한 꼴을 맛본 거겠지. 인생에서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한다네.”
그들은 더 이상 별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딱히 더 해야 할 만한 말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변호사는 쇠창살이 박힌 창밖으로 골짜기 건너 아주 멀리 있는 산을 문득 바라보았다. 변호사가 일어섰다. 그가 연약한 눈빛으로 야구선수의 슬픈 눈을 내려다보았다.
변호사가 악수를 하기 위해서 연약한 손을 내밀었다.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의 뼈마디가 딱딱했지만 약간 끈적거렸고 따뜻했다. 야구선수의 목에서 맥박이 뛰었다. 거구의 야구선수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허리를 굽혀 손을 잡았다.
“오늘이 마지막일세. 물론 법정에서 잠깐 함께 있겠지. 우리가 무슨 인연이 있다고……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 걸세.
내가 특별히 해줄 말은 없다네. 힐링이니 그따위 말들은 믿지를 말게. 그저…… 스스로 자신을 지키게. 살다보면 힘들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겠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

* * *

경찰에 체포된 투수는 결국 승부조작을 시도했다고 자백했다. 그가 자백한 경기는 지난해 여름에 홈에서 야간 경기로 벌어진 경기였다.
그때 브로커가 그에게 주문한 내용은 첫 이닝 첫 타자를 몸에 맞는 볼로 출루시키는 것이었다. 그것도 몸 쪽으로 속구를 던져서 허벅지나 정강이를 맞추라는 것이었다.
타자들은 언제든지 빠른 공이 자신의 몸 쪽으로 날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타석에 서게 된다. 그러니까 투수가 던지는 강속구는 자신의 머리로 언제든 날아올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수의 제구력은 늘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투수는 실제 타자를 이기기 위해 몸 쪽 승부를 한다. 그리고 가끔 투수는 위협구는 물론이고 악의적으로 몸에 맞히기 위해서 공을 던지기도 한다. 선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몸에 맞는 공의 고통이란 게 별 거 있나요?”
“안 맞아 봤으면 말을 마세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아프다는 것이다. 그 고통은 직접 당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살집과 근육이 두툼한 엉덩이나 허벅지는 그나마 괜찮다. 그건 뼈를 깨부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날 성민경의 시즌 10번째 선발 등판 경기였다. 그는 1여 년 만에 복귀해서 성공적으로 재기하고 있었다. 이미 6승째를 챙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 경기에서 1회 선두 타자의 목표지점을 향해 포수의 사인을 무시하고 인정사정없이 강속구를 던졌다. 그러나 타자는 엄청난 반사신경에 의해 엉겁결에 피해버렸다. 그리고 투수가 볼카운트를 조절할 틈도 주지 않고 2번째를 건드렸다가 볼이 붕 뜨면서 하늘로 치솟더니 내야 플라이로 아웃되었다. 그는 두번째 선수에게 안쪽 낮은 볼 2개를 던진 다음 스트라이크 1개를 던졌고, 볼카운트 2-1에서 바깥쪽 높은 볼, 몸 쪽 낮은 쪽으로 계속 공을 던져 볼넷을 허용했다. 그는 볼넷 이후 내야 수비 실책으로 다음 타자를 내보내 자초한 1사 1,2루에서 4번 타자에게 2루타를 얻어맞고 먼저 2점을 내줬다. 볼넷이 빌미가 되었다. 그는 7회에서 첫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고 내려갔는데 성민경의 기록은 6와 3분의 1이닝 5피안타 5볼넷 4실점이었다. 하지만 팀타선이 나중에 6점을 뽑아내며 6대 5로 역전승했다.
그는 그 경기 이후에도 브로커의 지시를 받고 승부조작을 시도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1회에 볼 컨트롤이 안 되는 척하면서 두 번씩이나 볼 넷을 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경기 기록상 성민경이 1회에 허용한 볼넷은 없었다. 첫 타자가 초구를 건드려 내야 땅볼 아웃됐고, 다음 타자들도 풀카운트 대결 끝에 높은 공을 쳐내서 외야 플라이로 아웃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2회 3점을 내주는 등 5이닝 5실점한 후 투수 교체로 내려왔다. 하지만 이날 팀은 7회 이후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끝내기 안타로 7대 5 역전승을 거뒀다.
그는 이제부터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쫓기기 시작했다. 성적은 뒤죽박죽이 되어 감독의 신뢰를 다시 잃어버렸다.
그가 경찰에서 진술했다.
“제가 승부조작을 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엄청난 도박 빚 때문에 그들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첫 번째 승부조작에 실패한 뒤부터 브로커들의 협박과 공갈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저 때문에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하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죽도록 때렸거든요.
저는 무서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자살할까도 생각했습니다.”
두목인 조폭은 구단에도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구단 소속 어떤 선수가 승부조작과 연루됐는데 내가 그 때문에 돈을 잃었다. 다른 구단은 이럴 경우 돈을 메꿔줬다며 돈을 요구했다. 브로커들은 약점을 쥐고 구단 소속 선수의 승부조작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구실로 거액의 돈을 요구한 것이다.
그동안 야구계에선 구단들이 소속 선수의 승부조작 사실을 자체 조사를 통해 알았으면서도 구단 이미지 등 악영향을 고려해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증거가 너무 명백했기 때문에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형사 법정
성민경은 도박과 외국환거래법 위반, 국민체육진흥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법정에 팽팽한 긴장감은 없었다. 그는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변호사는 연신 고개를 굽신거리면서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피고인은 흔히 말하는 대로 초범이고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글쎄 말입니다. 그리고 공갈 협박을 받은 가련한 피해자라는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동기와 그 과정을 면밀히 살펴봐 주십시오.
국가는 거대한 괴수이지요. 그 괴수는 언제나 비단뱀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습니다. 희생자를 통째로 삼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국가가 이 불쌍한 청년을 처벌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처벌만이 가능할까요?
처벌이라는 것은 그 안에 악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영국 법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다른 피해자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세의 율법에는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법 감정은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멸되지 않은 채로 살아있지요. 그러나 이 사건엔 피고인 이외에 다른 피해자는 없습니다. 피고인은 이미 충분히 처벌받았습니다. 삶의 전부이고 일생의 꿈인 야구와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충분히 준비했고 성공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이 젊은 사람을 변호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애송이 판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무테 안경 속에서 나른하게 눈알을 굴리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피고인을 내려다본다. 서로 시선이 엇갈린다.
3주 후 선고가 있었다.
판사는 엄하게 훈계하듯이 말했다.
“유명한 야구 선수는 공인이나 다름없고 커가는 어린이들의 꿈의 우상인데,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약물을 하고 해외 원정도박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승부조작까지 하였는바, 어떻게 피고인이 공갈 협박을 받은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요?
다시 말하면 처벌 받을 일을 했으면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지요. 그래야만 합니다. 그게 판사의 거룩한 임무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도 없으니 엄벌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판사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항소하고 말고는 피고인의 자유라고,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라고, 만약 항소를 하게 된다면 기간을 잘 지키라고, 말했다.
2017-11-25 11:40:26
121.xxx.xxx.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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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중원) 작가의 말 [5]   유중원 변호사   -   2017-08-18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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