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중편선> 유혹 (上)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7-11-25 11:37:31   조회: 272   
유혹



악마는 우리들을 유혹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악마를 유혹하는 것이다.
― G. 엘리엇

나는 유혹만 빼고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다.
― 오스카 와일드



변호인 접견실.
겨울 오후의 짧은 햇살이 교도소의 더럽고 꼴사나운 콘크리트 담벼락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다. 교도소 건물은 낡고 칙칙했다.
그 건물은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 (혹은 죄수들)의 슬프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지켜보았을까? 이 교도소는 시간의 흐름을 역행해서 뿌연 과거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주고 있지. 이 낡은 건물이 지금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숨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육중한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내부는 들어가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건물 밑에는 내가 모르는 비밀 통로와 어두운 지하 감옥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무한히 구불구불 뻗어 있는 통로는 아무리 헤매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고 다들 떠나버리고 나 혼자 남아 있다는 고독감과 한없는 불안감 때문에 몸서리치게 되는 미로가 아닐까. 한 낮에도 사형수들과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과 부패의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여기를 처음 왔던 게 언제였더라? 30년 전인가? 40년 전인가? 가물가물하다. 1980년대는 아주 폭력적인 시기였어.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지. 그런 걸 애써 외면하려고 한들 어쩔 수 없었어. 이 건물은 직업적 타성에 젖어 수없이 들락거렸지만 단 한 번도 내게 유쾌해 보이거나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늘 나를 옥죄는 두려움과 섬뜩함과 거북스러운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눈은 갈수록 침침하고 오줌 누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손등에 죽음의 예고편인 검버섯이 점점 번지고 있다고. 내가 입고 있는 20년도 더 넘은 빛바랜 양복을 보라고. 나는 늙었다고, 그것도 너무 늙었어. 세상은 원래 안개가 낀 것처럼 너무 흐릿하다고. 내 삶으로부터 도대체 뭘 그렇게 기대할 수 있었단 말인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게 그거야. 나에게 언제 좋은 시절이 있었긴 했던가?
늙은 변호사는 지친 표정으로 접견실에 무료하게 앉아서 희미한 옛 기억을 뒤적이고 기억들 사이의 틈새는 어리석은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유명한 야구선수는 TV에서 여러 차례 경기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바로 이웃집 총각인 것처럼 익숙한 모습일 터이다. 나이가 몇 살? 서른한 살이던가? 서른두 살이던가? 선수로서 아직 한창때일까? 아니면 지난 것인가? 그는 호남형의 잘생긴 얼굴에 키가 185센티미터를 넘고 근육으로 뭉쳐진 단단한 체구이니까 얼마나 위압적일까. 변호사는 점점 쭈그러들고 있는 자신의 왜소한 체구를 떠올렸다. 그리고 괜히 반쯤 벗겨진 머리 뒤쪽에 붙어 있는 몇 올의 흰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그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 그해 18승 7패에 방어율은 2.4였다. 그 중 21번을 퀄리티 스타트를 하였고 완투승 세 번, 완봉승 한 번이 있었다. 그러나 그해 최고의 컨디션이기는 했지만 탈삼진 기록만은 세우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의 주 무기는 타자 바로 앞에서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예리하게 휘어지는 커브와 체인지업이었고, 홈플레이트 바로 앞까지 직구처럼 날아와서 곧바로 타자의 바깥쪽 아래로 갑자기 도망가 버리는 슬라이더는 일품이었다. 불같은 강속구는 아니었지만 큰 키와 긴 팔을 이용해서 150킬로미터의 속구를 던지기도 하였다.

* * *

변호사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아들뻘 밖에 안 되는 그 유명한 야구선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부끄러운 듯 눈길을 외면한다. 그 눈에는 수줍음과 당혹감이 어렸다.
“교도소 생활은 잘 적응하고 있나요?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죄수들이 넘쳐나서…… 공간이 좁으니까 모두 어깨를 비비대며 지내야 할 거요. 프라이버시도 거의 없고 말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천만다행입니다. 옛날에는 감방에 벼룩과 빈대가 시커멓게 기어 다녔어요. 그리고 옷깃마다 개미만큼 큰 이가 붙어 있고 털마다 하얀 서캐들이 달라붙어 있었지요. 그게 디디티를 뿌려도 소용없어요.”
“옛날엔?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참고 지내야지요.”
“그렇다면 이곳 교도소 역시 피고인에게 잘 적응하고 있겠군요.”
“……”
“국선 변호사입니다. 법원에서 친절하게도 지정을 해주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유명한 야구선수였는데…… 스타가 아니었던가요? 죄목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선을 선임하는 게…… 그렇다면 저는 물러나야지요.”
“어차피 망가진 인생인데…… 비싼 돈을 들여서 사선을 할 필요가 있겠어요? 지금 돈도 없지요. 그런데 법원 때문에 원치 않는 사건을 맡게 된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선을 자원했습니다. 오래되었지요. 그런데 감방 안에서는 말들이 많을 텐데요.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전관예우를 들먹이지 않던가요?”
“몇몇 변호사들이 스스로 찾아왔어요. 그렇지요. 어김없이 전관예우를 들먹이더라고요. 금방 빼준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그 변호사를 선임하는 게?”
“어지간하게 불러야죠. 돈이 없다고 하니까 계속 깎아주겠다고 했지요. 시장 잡상인들도 그렇게는 안 하겠어요. 꼭 치사한 양아치 같더라고요.”
“그건 알고 계세요. 저야 뭐…… 국선이니까. 전관예우는 있을 수가 없지요. 그 대신 야구는 광적으로 좋아합니다.”
“아무렴 어때요. 전 빨리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안에서 콩밥을 먹으면서 수양을 쌓아야지요. 그래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밖에 빨리 나가면 그 자식들이 또다시 공갈 협박을 할 것 아니겠어요? 죽여 버리겠다는 말은 신물이 나지요.”
“그랬다고? 협박은…… 그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역겨운 속임수이거든.”
“그놈들이 또다시 괴롭히면 전 정말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야겠죠. 다시 말씀드리자면…… 변호사님이 너무 신경 쓸 것은 없다고 봐요. 대충 해도 상관없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마시게…… 그런데 결혼은 했던가요?”
“오래 사귀던 여자가 있었긴 합니다만……”
“이 지경이 되니까 멀리 도망가 버렸겠구만. 어차피 떠날 여자였어. 안 그런가? 처음부터 너무 심각한 이야기는 피해야 하겠지. 자네보다 열 살은 더 먹은 아들이 있다네. 야구 이야기를 해보지? 궁금한 게 많았거든.”
“정말 야구를 좋아하시나요?”
“그렇다니까. 두서없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물어보아도 괜찮겠지? 물론 내가 뭘 물어봐도…… 혹시 내키지 않으면…… 꼭 대답할 필요는 없다네. 다시 말하면…… 말을 돌려서 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건 시간 낭비니까.”
“그럴 리가요. 변호사님인데……”
그는 울퉁불퉁한 자기 손을 내려다보면서 수줍게 웃었다.
“옛날 우리 고등학교가 야구로 유명했지. 그때부터야…….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었지. 그중에는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했으니까…… 거기서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네만.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내가 야구장에 가본 적은 없다네. 그래도 TV는 열심히 보았지. 마누라는 야구라면 질색이긴 했었네만…… 그 여자는 지금 내 곁에 없지……”
“저는 야구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올라 왔지요. 학교 다닐 때 공부라곤 전혀 안 했어요. 오직 야구만 했지요. 그래서 머릿속에 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군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겠나?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래도 야구를 하면서 배운 게 많이 있었을 텐데?”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야구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 같은 거 말입니다.
저는 연습을 할 때도 야구 모자를 삐딱하게 쓰거나 챙을 구부리면 안 되는 줄로 알았지요. 지금까지 머리도 항상 짧고 단정하게 깎았어요. 그런데 전 이렇게 된 거죠.”
“야구는 참으로 미묘한 게임인 것 같은데…… 심리 게임이더라고. 야구 때문에 행복했던 때가 있었긴 있었나?”
“글쎄요…… 연습을 열심히 하고 나서 나른한 피곤함을 느낄 때는 정말 행복했지요. 그리고 관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불 꺼진 야구장의 적막함을 느낄 때…… 그때는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기막힌 승리의 기쁨 같은 거는 행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경기에서 패전 투수가 된 다음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슬픔 같은 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게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구만…… 야구 경기를 TV로 보면 투수들이건 타자들이건 스트라이크존에 매우 민감하던데. 그렇지 않은가? 가끔 노골적으로 심판에게 불만을 보이기도 하고.”
“심판들이 야구 규칙을 해석하는데 편차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심판도 인간인데요. 인간의 한계 아니겠어요? 현실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심판에 따라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스트라이크존의 문제점입니다.”
“그래서야?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람 눈으로 보면 스트라이크존의 상한선이 높게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규칙대로 적용하긴 곤란한 부분이 있으니까 실제 조금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 거죠. 타자가 서 있지 않고 구부리고 있어 상한선 자체가 조금 낮아지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가끔 지나친 오심이 눈에 들어와요. 그땐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심판을 의심하게 되죠.”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고 하더구만. 투수는 스트라이크존이 마음 속에 그려지나?”
“타자가 치기 좋은 게 스트라이크존입니다. 그러나 스트라이크존 역시 허공에 떠 있는 가상의 공간에 불과하지요. 분명히 정사각형은 아닙니다. 직사각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공간이 마음속에서 뒤틀리고 뭉개지기 때문에 경계선을 고정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존재하나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수는 허공을 향해 공을 던지고 타자는 허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르죠. 그래서 허공에서 공과 방망이가 접점을 찾는 겁니다.
타석에 서 있는 타자는 투수가 자신을 상대로 스트라이크를 던지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좋은 타구가 많이 나올 수 있는 존입니다. 그래서 타자는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려고 하는 것 이상으로 그 공을 때리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이지요.”
“그날 경기할 때 보니까 땀을 좀 흘리더만…… TV화면에 땀방울이 보이니까.”
“그렇겠지요. 땀을 흘릴 수밖에 없지요. 경기가 안 풀리면서 핀치에 몰리게 되면 긴장하게 되고…… 이것저것 불안하거든요. 불안하면 땀이 많이 나는 것 같아요.”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표정에서, 투수 동작에서 그걸 감춰야 한다. 타자와의 심리전에서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는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
그는 송진 주머니를 천천히 가볍게 주무르면서 시간을 지체하고 다시 사인을 받기 위해 포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타자의 자세와 미세한 몸동작을 예민하게 관찰한 후 볼을 뿌렸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너는 내가 어떤 볼을 던지는지 예측할 수 없어. 그러니까 타이밍을 절대 잡아낼 수 없단 말이야. 칠 테면 쳐 보라니까. (물론 그가 전성기 때의 일이다.) 그러나 타자는 그의 마음을 이미 읽고 있었다는 듯이 방망이를 날카롭게 휘둘러서 멋있게 안타를 쳤다. 1루에 있던 주자는 잽싸게 3루까지 진출하고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투수의 볼 배합에 기본과 같은 원칙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답은 없겠지? 볼 배합은 투수와 포수의 합작품 아니겠어?”
“볼 배합은 타자와 투수 간 피나는 머리싸움이지요. 동시에 투수와 포수 간 호흡 문제이기도 합니다.
투수마다 자신만의 결정구가 있어야 해요. 그게 없으면 프로야구에서 좋은 투수가 될 수 없어요. 결정적 순간에 그 공을 던지기 위해 먼저 반대쪽으로 향하는 공을 던져 타자의 시선을 분산시킵니다. 일종의 사전 예비작업이지요.
타자는 먼저 바깥쪽 공이 들어오면 다음에는 몸 쪽 공이 들어온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생각은 그렇더라도 막상 몸 쪽으로 공이 예리하게 찌르듯이 들어오면 몸은 쉽게 반응하지 못하고 움찔합니다. 그래서 지그재그 투구가 볼 배합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차간에 어느 정도는 상대방 수를 알고 있을 텐데?”
“프로 야구에서는 경기 전에 상대 타자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분석은 이미 끝낸 상태이지요. 짧게는 한 시즌, 길게는 수년간 축적된 데이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타자의 약점만 줄기차게 공략하면 이길 확률은 높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타자도 투수의 약점을 훤히 꿰고 있거든요.”
“투수들은 결국 도박사들이 아닐까? 볼 배합은 어느 정도 도박적인 요소가 있지 않겠어? 선택의 문제이니까. 다시 말하면…… 삼진을 잡으면 도박에 성공한 것이고 안타를 맞으면 실패한 거지.
그런데 도박사들은 어쨌거나 미신을 믿게 되어 있어. 그리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행운의 부적을 믿고 있지. 그래서 징크스가 생긴 다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가 도박을 했다는 말씀이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볼 배합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결정구가 있어야 합니다. 타자를 상대할 때, 핀치에 몰리면 투수는 결정구를 던져야 하는 상황과 마주치게 됩니다. 투수의 결정구는 대부분 변화구이지요. 강속구를 결정구로 준비하는 투수는 거의 없습니다.
결정구는 타자의 눈에 익은 공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래도 눈에 익은 공을 또 던지면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베이스 코치는 온몸을 이용해서 팔을 휘두르며 사인을 보내지 않는가. 포수는 손가락을 폈다 쥐었다 하면서 손가락 개수를 몇 차례씩이나 바꾸고 말이야. 그 복잡한 사인이 차질 없이 전달될 수 있겠어?”
“사전에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포수가 손가락 한 개를 보내면 직구를, 두 개를 펼쳐 보이면 변화구를 던지라는 식이지요. 가끔은 투수가 어깨에 손가락을 대고 포수에게 먼저 사인을 보내기도 합니다.
사인은 상대방에게 노출되면 안 되니까 극비 사항인 거죠. 그러나 너무 복잡하게 하다보면 깜박하고 헷갈릴 때도 있어요.”
“투수는 포수와 호흡이 잘 맞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포수가 사타구니 사이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할 때 보면 손톱에 형형색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는 걸 볼 수 있지요. TV 화면에서는 안 보일 수도 있어요. 이들 손톱은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검정색, 야광색 등으로 요란하게 치장하고 있다구요. 손톱을 보호하는 게 아닙니다. 투수를 위한 배려이지요. 투수가 사인을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포수가 투수의 마누라도 아닌데 투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나 신경을 쓴다구?”
“포수가 영리하고 경기 운영에 여유가 있으면 투수는 정말 편하지요. 그리고 결과가 좋게 나오면 덩달아 좋은 평가가 나오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노련한 포수는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도 투수에게 믿음을 줘야 합니다. 저는 믿을 수 있는 포수인 경우 대부분 포수의 사인대로 던졌습니다. 그러면 결과가 괜찮았지요.
그런데 어설픈 포수인 경우에는 투수는 불안해져요. 커브 볼을 던지기가 망설여진다니까요. 가랑이 사이로 흘릴 것만 같거든요.”
“그러니까 경기 결과를 보고 평가한다는 건가?”
“중요한 것은 결과 이전에 과정이지요. 과정이 좋으면 결과도 좋게 나오는 거겠지요. 상대방 타자들이 경기 초반부터 타석에서 서두르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오는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빨리 점수를 뽑아 선발을 무너뜨리려고 한 거죠. 그러면 포수가 싸인을 보냅니다. 그런 타자들한테 스트라이크를 던질 필요가 있나요. 살짝 살짝 빠지는 유인구로 범타를 유도하지요.”
변호사는 의자가 몹시 불편한 듯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몸을 꼼지락거렸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때가 낀 누런 책상 위에 놓인 검정 볼펜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그가 다시 말했다.
“신경전이 대단하구먼.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투수는 누구보다도 머리가 명석해야 되겠지?”
“그건 정말 피 터지는 신경전이지요.
투수와 타자는 공 하나하나에 수 싸움을 벌입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의도를 알게 되면 상대하기 수월해지니까요. 포수는 홈플레이트 뒤에서 투수가 유리해지도록 리드 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중심 타선과는 달리 하위 타선은 좋은 공이 들어와도 볼 하나 정도는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오히려 스트라이크존으로 공을 던지지요.
투수가 무슨 일 때문인지 평소답지 않게 바싹 얼어붙어 있을 때가 있어요. 이때 포수가 이거 안 되겠다 싶으면 투수를 달래주어야 해요.”
“그러니까 포수는 투수에게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는구먼. 마누라는 그렇지 못해…… 잔소리나 하지.
그래서 투수와 포수가 서로 어루만지듯 호흡이 잘 맞으면 폭투나 패스트 볼은 훨씬 줄어들겠군.”
“그러니까 포수는 쉬운 포지션이 아니에요. 그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메고 홈 플레이트 뒤에 쭈그리고 앉아서 모든 종류의 볼을 다 받아내야 하지요. 미트질을 잘 해야 해요.
그리고 홈 플레이트에서 충돌하면 큰 부상을 당하기도 하지요.
그때 우리 팀 주전 포수는 아주 노련했어요. 그래서 투수들은 그가 요구하는 공을 누구도 감히 거부하지 못했지요. 거기다 타율도 높았고요. 그런데 3루에서 미친 듯이 달려들던 거구와 부딪히면서 다리가 부러지고 뇌진탕을 당한 거예요. 그걸로 선수생명이 끝장났어요.”
“그러면 백업 포수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겠구먼……”
“그런데 그 포수는 투수 리드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타율이 엉망이었죠. 맨날 헛스윙 삼진을 당했어요.”
“포수의 고충을 알만 하군.
그런데 상대팀 강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울 때 기분은 어때? 기분이 째지지 않는가? 그때 타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역하지. 삼진을 먹고 나서 볼이었는데 왜 그게 스트라이크지? 괜스레 주심 탓을 하며 은근히 째려보고 나서 덕아웃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거든.”
“타자는 마치 허공에서 어떤 허깨비를 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심 쓴 웃음을 지었겠지요.
그러나 삼진 잡았다고 마운드에서 퍼포먼스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방 감정만 건드릴 뿐이지요. 그 타자는 다음에 또 만나게 되어 있거든요. 쓸데없이 감정을 주고받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면, 반대로 투수가 홈런이나 만루 홈런을 맞은 기분은 어떨까? 대게는 망연자실 하던데.”
“홈런 친 타자는 투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겠어요. 제 잘난 척 희희낙락 하지요. 그때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털썩 주저앉아서 울고 싶지요. 그리고 막 후회가 되는 겁니다. 차라리 볼을 주고 말걸…… 그렇게 던져서는 안 되는데……”
“현역 홈런 타자라면 역시 이승엽이나 이대호, 그리고 박병호가 대충 생각나는 구먼. 언제였더라? 여기 구장에서 박병호가 친 홈런 볼이 담장을 훨씬 넘은 적이 있었지. 정말 멀리 나갔어. TV 카메라가 쫓아가지 못했으니까.”
“그 공은 아마 지금도 멀리 날아가고 있겠지요. 그날은 공이 정말 안 좋았어요. 공이 춤을 추어야 하는데 밋밋했거든요.
흥분해서는 안 되지요.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어요. 열 받으면 틀림없이 제구가 안 돼요. 그러면 웬일인지 투수 마운드에서 포수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거리가 아득하게 멀어 보이더라고요.”
“컨디션이 안 좋았겠지?”
“컨디션이 안 좋으면 공에 자신이 없으면서 의구심이 들지요.”
“공이 투수 손을 떠날 때 느낌이라는 게? 어떤? 내 말은 공이 갑자기 터무니없이 솟구쳤을 때를 말하는 거야? 그러면 웃음이 절로 나오지.”
“손이 공을 장악하지 못 했을 때이지요. 그때는 공이 바람처럼 어디론가 날아가서 공기 속에 녹아 없어져 버리지요.”
“어떤 때는 감독이 격려해 준 적이 있겠지? 누가 뭐래도 네가 팀의 주전 투수다. 왜 이런 말을 하냐 하면 한 때는 최고의 투수로 대접받았으니까. 책임감을 가지고 팀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던가?”
“한 때 저의 입지가 매우 불안했지요. 제가 이런 저런 부상에 시달리면서 하향세에 있으니까 구단은 외국 투수를 영입 하였거든요. 그래도 감독님이 내가 잘해야 된다고 다독여주며 신뢰를 보내주시면 그때는 자부심이 생기지요. 그건 프런트가 자기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결정한 거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언젠가부터 포수가 투수에게 공을 잘 닦아서 건네주면 포수가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쏟고 투수를 믿고 존경하기 시작한 거라고 봐야겠지요.”
“감독이거나 또는 투수 코치는 경기가 진행하는 중에 투수교체를 하는 기준이 나름대로 있겠지. 투수교체 시기를 잡는 것이 승패를 가를 만큼 굉장히 중요해 보이거든.”
“대부분의 감독은 투수의 볼끝이 무뎌졌다고 여겨지면 다음 투수를 준비시키지요. 그러니까 던진 투구 수보다는 볼끝이 우선이지요. 투수가 그날 시합에서 만족스럽게 볼을 던졌다고 한다면, 첫째는 제구가 잘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볼끝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볼끝이 좋은지를 어떻게?”
“볼이 끝까지 살아 움직이면 볼끝이 좋은 것입니다. 볼끝이 좋으면 스피드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빨라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이때 타자는 공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헛스윙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투수가 마운드에서 한결 여유롭게 행동할 수는 없나? 가끔 웃고 말이지……”
“어떤 경우이건 마운드에서 웃을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항상 긴장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인상을 쓸 수도 없습니다.
내야수나 외야수나 할 것 없이 어느 순간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면 온몸에서 힘이 쏙 빠지지요.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자주 실수를 하거든요. 빨리 털어버리고 오직 경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얼간이 같은 플레이라는 뜻으로 본헤드플레이가 있지 않은가?”
“정말 기가 막히지요. 그래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주 가끔…… 저도 몇 번쯤은 당황한 나머지 그런 플레이를 한 적이 있었겠지요.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가끔 빈볼 시비가 일어나는데…… 그러면 벤치 클리어도 일어나고 관중들이 보기엔 그게 게임보다 더 재미있다고.
자네도 투수니까 그걸 던졌겠지. 그렇지 않은가? 한 번도 안 던진 건 아니겠지.”
“전 그걸 싫어하지요. 빠른 공에 정통으로 맞는다면 심한 부상은 물론이고 죽을 수도 있어요. 같은 동업자끼리 그러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전 개인적 감정으로 그걸 던진 적은 없어요. 하지만 팀 분위기 상 반드시 던져야만 하는 상황이 있어요. 가령 상대방에게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말입니다. 팀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걸 거부하면 배신자가 되지요.”
“내가 보기에는 말일세…… 공에도 감정이 깃들어 있더란 말일세. 타자가 빈볼을 맞으면 어떤 의도로 던졌는지 감이 오지 않겠나. 다시 말하면 공에 맞은 타자가 고의 사고라고 느꼈다면 일부러 던졌을 확률이 높다는 거지.”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실수로 맞힌 공이 고의로 취급 받아서 억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요. 제가 변화구를 던지려고 손목을 꺾었는데 상대방 타자는 얼굴과 몸을 향해 공을 던지려고 했다고 오해를 한 것이죠.”
“내가 타자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잘 알 수는 없네만…… 그 당시 경기 상황이나 날아오는 볼의 속도…… 맞았을 때 타자의 느낌을 보면 의도가 담긴 공인지 알 수 있지 않겠나?”
“글쎄 말입니다. 투수가 모자를 벗고 인사를 안 했다고 해서 그게 고의 사고의 근거가 될 수는 없겠지요. 제구도 안 되고 큰 점수 차로 뒤지고 있는데 투수가 사과까지 해야 할까요?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투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고의인지 실수인지……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구만…… 잘 알겠네. 역시 만원 관중이 최고지? 엔도르핀이 마구 솟구칠 것이 아니겠어? 혹시 관중의 함성소리에 압도되어 기가 죽을 수도 있겠네.”
“경기를 할 때는 관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이 제가 던지는 공에 집중하면 그럴수록 오히려 에너지를 더 받았다고 해야 되겠지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저는 경기 규모가 클수록, 관중이 많을수록, 팬들이 몰려들수록 경기를 더 잘 해냈어요.
그걸 즐길 줄 알았던 거지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배짱이 있었던 겁니다. 저의 경우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관중들 때문에 무척 흥분하기도 했지만 아주 불안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든 관중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흥분되고 불안한 감정에 자기를 내맡겨야 하지요.
그러나 많은 관중 수에 겁을 먹은 선수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큰 경기에서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습할 때는 기가 막히게 던지는데 막상 시합에 나오면 영 아닌 거죠.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누구라고 지적하고 싶지는 않네요. 이쯤 해두죠.”
“모든 일이라는 게 신체적인 것만큼 정신적인 부분의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네. 그런데 팀의 주장을 맡은 적이 있었나?”
“주장은 팀의 사기를 올리거나 분위기를 다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저는 주장이 될 기회가 없었습니다. 누가 추천해도 아마 거절했을 것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잘 알지 않겠어요?”
“잘 나갔을 때는 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면서 팬클럽도 생겼을 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 여자도 거기서 만났지요. 그러나 제가 이 모양이니 흐지부지 되었지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 하루 종일 지루할거야. 책을 읽게나. 책은 악귀나 잡신을 쫓아내는 부적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게 시간을 때우는 데는 제일이지.”
“그럴까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내가 몹시 피곤하다네. 늙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라네.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신경쇠약 때문인지 요즈음 불면증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지.
일주일 후에 다시 오겠네. 기록을 복사하고 잘 읽어야 하니까. 피고인이 국선을 취소할 거로 지레 짐작하고 복사 신청을 안했었지. 추운 날씨에 몸조심 하시게.”

* * *

성민경은 도핑 검사에 걸려서 출장 정지를 당한 후 오늘 처음으로 출장하였다. 토요일 낮 경기였다. 그는 마운드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차갑고 투명한 하늘이었다. 눈이 시렸다.
그는 지난 밤에 잠을 설치면서 생각했었다. 가수면 상태에서 많은 생각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다시 마운드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몇 번이나 상상했었다. 내가 이번 일로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팀 동료들의 표정은? 관중들의 반응은? 그때 구단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실은 구단을 위해서 투수는 심한 허리 통증 때문에 금지 약물인지 모르고 복용했다고 발표했으니까, 그건 일부는 맞는 사실이다. 나는 온몸을 쥐어짜서 투구를 하니까 관절이 있는 무릎과 허리, 팔꿈치, 어깨 등 안 아픈 데가 없지 않은가. 열성 팬들은 그렇게 믿고 있겠지? 그걸…… 당분간 잊을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 오직 볼 하나하나에 집중하자. 약물의 후유증은 말끔히 털어냈다. 나는 몇 달 동안 제대로 몸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 않은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다시 부름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굳게 확신할 수 있었던가? 과연 어떤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인가? 짧았던 영광의 날들이 먼 과거의 일로 되어버릴 것인가? 올해는 지루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갈 것이 아닌가…… 내년은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완봉승을 할 때였다. 그때는 공을 던질 때마다 모든 잡념이 사라졌고 완전히 집중하였다. 9회 말이었던가? 아니면 9회 초였던가? 우타자의 무릎 쪽으로 예리하게 파고드는 스트라이크를 던졌고 마지막 타자는 멍하니 쳐다보다 꼼짝없이 삼진을 당했다. 그 완봉승은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순간 공은 어째서 마술을 부린 것처럼……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치는 것처럼…… 스트라이크존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일까? 그 후 가끔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벌써 자정이 지났다.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1회 말부터 선발 투수가 두들겨 맞았다. 4회가 되자 벌써 5점이나 내주었다. 5회 말 성민경이 등번호 19가 새겨진 흰색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자 관중석에서 가벼운 환호성이 터졌다. 홈 팀을 응원하는 관중들은 1루 쪽 방공호 뒤편에 몰려 있었고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만에 그가 마운드에 우뚝 선 것이다.
그는 마운드로 올라가면서 초조함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는 숨을 몇 번이고 깊이 들이 쉬었다. 그리고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관중의 수는 관중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 년 사이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위안을 삼는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려 한다.
첫 상대는 1번 타자였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타자를 노려보며 어린 포수의 손가락 신호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초구를 던졌다. 시속 131킬로미터 높은 변화구였다. 심판은 가차 없이 볼 판정을 내렸지만 관중들은 그래도 함성을 지르며 첫 투구를 반겼다.
이날 성민경은 날씨가 쌀쌀한 탓인지 볼 컨트롤이 좋지 않았다. 벌써 4월이었지만 꽃샘추위가 운동장을 덮고 있었다. 잔인한 4월. 연속 안타를 허용한 성민경은 무사 1,3루에서 센터 깊숙이 날아간 희생플라이를 맞고 선취점을 내줬다. 후속 타자들을 간신히 범타로 처리했지만 5회에만 벌써 25개의 공을 던졌다.
6회에도 성민경은 선두 타자에게 하염없이 볼넷을 내줬다. 그러나 다음 타자를 병살타로 잡으면서 한숨 돌렸고, 세 번째 타자는 볼 카운트 3-2 풀카운트에서 몸 쪽 낮은 변화구로 삼진 처리하며 실점 없이 마쳤다.
너무 긴장했던가. 땀방울이 온몸에 송글송글 맺혀서 흘러내려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더그아웃에 들어온 성민경은 흰색 두터운 다운점퍼를 입고 연신 손을 비비며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위기는 7회에도 계속 이어졌다. 연속 안타를 맞은 성민경은 무사 2,3루에서 희생플라이를 내주고 2실점 째를 하였다. 투수 코치가 올라왔다. 그는 올라오자마자 다짜고짜 투수에게 심호흡부터 시켰다. 그리고 나무라듯 말했다. “자신감을 가지라니까. 두들겨 맞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라니까. 볼을 던지지 말고 스트라이크존 구석으로 던지라고……” 그리고 어깨를 툭툭 치고 내려갔다.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그러나 다음 타석 때 도루에 이어 폭투가 나오면서 또다시 실점 위기에 몰렸고, 타자가 안타를 치면서 3점째를 내줬다.
또다시 폭투가 나오면서 1사 2루가 된 상황에서 성민경은 다음 타자를 3:2 풀 카운트에서 9구만에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미 예정했던 투구 수를 초과한 상태였다.
그는 어깨를 내리 누르는 피곤을 느꼈다. 이때 투수코치가 구심에게서 새 공을 받아 쥐고 다시 마운드로 올라왔다. 이는 투수교체를 의미했다. 실망한 기색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후속 투수가 안타를 맞으면서 성민경의 실점은 4점으로 늘었다. 경기는 9대 1로 졌다.
그는 멀리 우뚝 서 있는 경기장 조명탑을 새삼스럽게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벤치를 향해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두리번거렸고 은근히 감독과 코치들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거세어진 바람이 운동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근 1년 만에 돌아온 벤치가 반갑다기보다는 매우 낯설었다.
이날 성민경의 최종 성적은 2와 3분의 2이닝 동안 4실점이었다. 투구 수는 65개 (스트라이크 35개, 볼 30개)를 기록했고, 직구 최고 구속은 139킬로미터를 찍었다. 그러나 관중에게 기록은 의미가 없었다. 팬들은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성민경을 위해 박수를 보냈다. 성민경도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
이날 성민경은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몇 명에게만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스트라이크를 던지는데 애를 먹었다. 변화구가 제구가 안 되면서 직구로 승부를 했지만 구위는 아직 덜 올라온 상태였다. 안타 전부가 밋밋한 직구를 던지다 내준 것이었다.
팀의 전력분석 코치는 어느 야구 전문 기자에게, 변화구의 각도와 스피드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스트라이크존에서 터무니없이 너무 크게 빠지는 공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변화구 제구가 관건이라고, 특히 예전의 날카로운 커브와 슬라이더의 위력을 되찾는 것이 재기의 관건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경기 후 성민경은 마냥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1년여 만에 마운드에 서니까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투구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점점 좋아지겠지요……. 조급한 마음에 마운드에서 다소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밸런스가 깨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스트라이크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요. 빠른 시일 내에 투구 수를 100개까지 늘리는 게 목표입니다.”

제구력과 스피드를 모두 타고난 투수는 거의 없다. 투수가 빠른 공을 가지고 있으면 빠른 공과 밸런스를 맞추는 제구력이 부족하게 된다. 이처럼 뛰어난 제구력과 타자를 압도하는 스피드를 다 갖춘 투수는 드물다. 프로야구 역사에서 제구력과 빠른 공을 모두 보유한 투수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국보급 투수로 회자되거나 메이저리그로 진즉 진출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선동열, 최동원, 박찬호, 류현진, 오승환 선수처럼 말이다.
성민경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빼어난 스피드를 자랑했고 프로 야구 초기 시절에도 그의 스피드는 국내에서는 수준급이었지만 점점 스피드는 줄었다. 그는 스피드 대신 정확한 제구력을 연마했다. 그는 원하는 곳에 구석구석 공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한 것이다.
그때 감독으로 올라갈 가망이 전혀 없는 늙은 투수 코치가 말했던 것이다. “공부 안 하고 시험을 잘 볼 수 없어. 제구를 잡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3배, 4배 이상 많이 던져야 한다. 그런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다. 요즘 투수들이 제구가 안 좋은 건 그만큼 안 던지기 때문이야.”
그는 자발적인 훈련을 강조하며 노력하지 않는 자세를 질타했다. 피나는 노력 없이는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제구를 잡기 위해서는 수많은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요즘 투수들은 힘든 걸 안 하려고 한다. 프로가 왜 프로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야구 선수에게는 인간이 먼저 되는 게 첫 번째 덕목이겠지. 누구나 그걸 강조하지. 그걸 누가 모르겠어? 그러나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된다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세가 더 필요하단 말이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꽝이 되는 거라고.”
그런데 왼손잡이가 더 대우받는 분야가 있다. 야구 선수의 경우이다. 야구는 다른 종목에 비해서 왼손잡이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왼손 강속구 투수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오라는 야구 속담이 있는 것이다. 모든 팀은 왼손 투수에 대해서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같은 강속구를 던져도 오른손 투수보다 왼손 투수가 훨씬 유리하다. 이는 좌우 타자를 가리지 않는다. 좌완 투수가 던지는 공은 우타자의 몸 쪽으로 각도 상 더 파고드니까 더 빠르게 느껴진다.
일류 투수들의 폼은 제각기 개성이 강하지만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 공이 나오는 지점을 알아채기 어려운 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릴리스 직전까지 공을 감췄다가 느닷없이 공이 나오는 느낌을 준다. 우연히 그렇게 하는 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공을 감춘다. 투수는 가능한 공을 오래 숨겨야 한다. 우타자를 상대하는 좌완 투수는 자연스럽게 릴리스 직전까지 공을 숨길 수 있다. 왼팔의 스윙과 몸통과 머리에 가려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수가 아무리 위력적인 직구와 다양한 구종을 갖추고 있어도 그것만으로 이길 수는 없다. 타자와 타이밍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게 컨트롤이다. 아무리 강속구 투수라고 하더라도 제구가 안 돼 실투가 나오면 얻어맞게 되어있다.
야구에는 구속 이외에 수많은 변수가 있다. 스트라이크존 구석을 찌를 수 있는 제구력과 완급 조절로 타이밍을 뺏을 수 있는 변화구 구사 능력이 스피드 이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강속구라도 비슷한 코스로 계속 오면 타자가 때려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제대로 맞게 되면 반발력 때문에 큰 타구가 나오게 된다.
왼손잡이인 성민경은 크고 작은 부상 때문인지 공이 점점 느려졌다. 그래서 제구력과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완급 조절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타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코스인 무릎 근처로 공을 던져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능력을 연마했다. 여기에 직구와 변화구의 구속 차이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투구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140킬로미터 정도인 평범한 직구에 비해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는 더 느리고, 심지어 커브볼은 타자의 방망이가 다 돌아간 이후에는 공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대 타자는 타이밍을 못 맞춰 땅볼을 치기 일쑤였던 것이다.

* * *

오늘은 창문이 없는 방이 배정되었다. 사방이 퇴색한 회색 벽인 방이다. 접견실의 천장 형광등은 오래돼서 짙은 젖빛 색깔이었다. 변호사는 의자에 앉으면서 좀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무게를 이리저리 이동하였다. 한쪽 벽 위에 붙은 환풍구에서 담배 냄새라도 올라오는 것처럼 코를 벌름거린다. 복사한 기록은 한편으로 치워 놓은 채 실눈을 뜨고 여전히 야구 이야기를 꺼냈다.
“피나는 두뇌 싸움을 한다고 했는데…… 오늘은 슬럼프에 대해 이야기 해보지. 모든 게 슬럼프 때문에 발단이 된 게 아닌가? 그러니까 슬럼프를 이기려고 그 빌어먹을 약을 먹었던 게지.
그리고 재수 없게도 도핑검사에서 걸려 출장정지를 당했고…… 정말 재수 없었지…… 그냥 속아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 기간 중에 도박을 했고, 도박 빚 때문에 승부조작까지 하게 된 것이 아닌가?
가장 좋은 약은 인내라고 했네만……
약물, 도박, 승부조작은 악마였지……”
“그렇게 되었지요. 슬럼프 말인데요…… 처음엔 잘 몰랐어요. 내가 어느 순간부터 야구를 즐기지 못하게 됐다는 걸…… 그땐 야구에 전념했고 어떻게 해서든지 완벽하게 내 몸을 관리해야만 했거든요. 건강관리를 위해서 스케줄을 얼마나 지독하게 짰는지 몰라요.
몸에 좋다는 보약도 끊임없이 먹고 뱀탕께나 마셨지요.
지금은 컨디션이 괜찮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슬럼프가 올 것이라는 걸 생각해서 거기에 맞춘 것이지요. 이미 슬럼프를 겪은 동료 선수들의 경우를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내 몸을 엄격하게 통제했어요.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틀 안에 나를 옭아맨 거죠. 그게 감독님의 지시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어느 종목이건 운동선수가 아무리 자신을 관리해도 슬럼프는 오거든요. 아무런 상관없이 와요. 처음에는 왜 오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지요.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제가 좀 민감한 편이거든요. 잦은 이동으로 불규칙한 생활을 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밤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남몰래 수면제를 먹기도 해요.
그럴 때 온몸이 멍들고 피로가 겹치면 야구가 지독히 싫어질 때가 있어요. 그때는 무조건 쉬어야 되는데…… 팀 사정상…… 감독님 눈치도 봐야하고……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인정하고 그걸 솔직하게 털어 놓아야 슬럼프가 오질 않는 겁니다.
웬만한 부상은 혼자 진통제를 먹으면서 숨겨야 했습니다. 출전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으니까요. 그걸 선수들이 가장 싫어해요.
그렇게 자신을 통제 하다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최면을 걸게 된답니다. ‘지금 괜찮다니까! 참으라고! 참아야 된다고!’ ‘정말 잘 하고 있다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속삭이는 거죠.
결국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몇 번이고 속이면서 학대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반드시 무너지는 거죠. 운동장이 지옥처럼 느껴져요. 공에 손을 대기 싫어지죠.”
“그러니까……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온 느닷없는 슬럼프가 주저앉혔다는 거네. 평균 자책점이 어느새 5점대 이상으로 올라갔군. 야구 천재라고 칭송하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기 시작했겠지.”
“동네 야구선수라든가, 아마추어 선수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왔지요. 술만 마시고 연습을 게을리 한다는 소문도 돌았구요. 저는 그때 야구장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싫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그러나 감독은 팀이 연패에 빠지니까 눈치도 없이 자꾸 내보냈지요.”
“정말…… 그랬었나?”
“정말 실컷 놀았으면 억울하지도 않았어요. 누구보다 기를 쓰고 있는데. 매일 술집에서 새벽까지 술을 먹었네, 도대체 연습을 안 한다고 하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들 그런 식으로 입방아를 찧는 걸까, 싶었습니다.
팬클럽 사람들이 한 술 더 뜨는 거예요.
그러나 냉가슴을 앓았지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괜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그거 아세요? 제가 출전 정지를 당하니까 그때 비로소 푹 쉬게 되었다니까요. 그때에야 비로소 내 곁에서 끊임없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몇몇 사람들이 보이더라고요. 난생처음 푹 쉬면서 낚시도 가보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실컷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그 전에는 어디 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고 속마음을 주위 사람에게 말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여행을 다니긴 했어? 마카오 쪽 말고……”
“마음만 먹었지요. 국내는 어딜 가든 다들 제 얼굴을 아니까 사람들 만나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거길 갔었지요.”
“왜? 그랬어?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데……”
변호사가 그를 나무라듯 부드럽게 말했다.
“좀 더 진즉 그런 걸 알았더라면…… 그런 걸 깨칠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 건 다 낭비라고 생각하고 죽도록 훈련하고 운동만 했던 거죠.
그러다가 출장 정지를 당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나 자신을 더 아껴주지 못해서, 주위를 더 돌아보고 쉬어갈 줄 몰라서 그런 시간을 겪고 있다는 걸요.
힘들면 울고, 즐거우면 웃어야 하는데 그동안 나는 그런 것에 초연한 사람인 척 살아왔어요. 남들보다 강하다고 믿었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나도 약하다는 걸, 나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걸, 나도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걸 알았어요. 그걸 알고 나니 편해졌어요. 그때부터 비로소……”
“구속되고 나니까 기분이 어땠어? 유명한 선수가 구속되니까 매스컴에서 상당히 씹었겠지. 자존심이 상했겠네.”
“뭘…… 그렇지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도 등을 돌리더라구요. 더 난리를 쳤지요.”
“그런 게 세상 인심이라네. 어쩌겠어? 기자들이란 게 머릿속에는 쥐뿔도 들어있는 게 없으면서 입만 살아있는 자들이야. 평생 남을 씹는 직업이라네.”
“어쩌면 내 인생은 지금부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젊거든요. 그동안 산등성이에 서있는 소나무처럼 홀로 지냈다면 이젠 여러 그루의 나무들과 함께 지내야 되는 시기가 온 거겠지요.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야구를 잊어버려야죠. 무슨 일을 하던 인생의 밑바닥부터 새로 출발할 거예요.”
“스타가 밑바닥부터 출발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마음을 완전히 비워야 하니까. 내 아들 말이야…… 좋은 대학을 나오고 고시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수없이 떨어졌다네.
결국 폐인처럼 되었지. 지금 어디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없어……. 그러니까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있겠지.”
“아버지이신데 아들을 잘 좀……”
“인생은 가는 대로 가는 거라네. 자기 인생이야. 다 자란 자식한테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네.
그걸 알게나. 인생도 슬럼프가 수없이 많다네. 슬럼프의 연속이지. 나를 돌아보면 오히려 슬럼프 기간이 훨씬 더 길었지.
행복했던 시절이 도대체 기억나지 않는다네. 여자들의 갱년기는 생리적 슬럼프이고. 늙으면 죽을 때까지 슬럼프이지. 슬럼프란 결국 고통이고 불안이고 강박 아니겠나? 그보다는 울화라고 해야겠군?”
“그럴까요?”
창살이 박힌 먼지 낀 창문으로 들어오던 겨울 늦은 오후의 일광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마 저물어가고 있던 황혼의 마지막 빛줄기였을 것이다. 멀리 교도소 밖 간선도로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 해가 짧군.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며칠 후 다시 오겠네. 나이가 들수록 겨울은 정말 지긋지긋하지. 차가워진 날씨와 함께 세월의 스산함을 느낀다네.
요즈음은 척추협착증 때문에 오래 앉아있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네.”

* * *

성민경은 프로 야구 데뷔 후 5년 차부터, 그러니까 처음 팀에서 별 볼일 없는 중간계투 선수로 몇 년을 보낸 후 트레이드가 된 다음 해부터 투수로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때부터 팀의 주전 투수가 되었고 덩달아 몸값도 뛰고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몇 년 후 그는 공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고 방어율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따라서 이기는 경기보다 패전하는 경기가 더 많아졌다. 이제는 2군으로 내려가야 할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밋밋한 공은 어김없이 얻어맞았다. 그래서 그 즈음엔 내 실력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게 되었다.
야구에서 슬럼프의 기준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타자의 경우 지난 시즌 대비 타율이 현저히 떨어졌거나 투수의 경우 평균 방어율이 현저히 상승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스타급 최고의 선수라 해서 슬럼프를 겪지 않거나 또는 덜 겪거나 무명 선수라고 해서 슬럼프를 더 자주 겪는 것은 아니다. 성적이 뛰어난 선수가 슬럼프를 안 겪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다. 어느 스포츠이건 선수는 오랜 선수 생활 중에 슬럼프를 경험한다. 슬럼프는 신체적 이상과 함께 오기도 한다. 오히려 가장 흔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수가 까닭 모르게 슬럼프를 겪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는 봄 동안 허리 통증을 겪었던 그 해에 극심한 슬럼프로 선수 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 꾸준히 양방과 한방 치료를 받았지만 5.16까지 치솟은 방어율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리 통증이 가셨는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번 무너진 투구 폼이 도대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슬럼프를 피하려고 하는 것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선수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바닥을 찍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을 때 그때부터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선수들은 자신이 슬럼프에 빠져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데?) 그러면 슬럼프는 헤어날 길 없이 길어진다.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은 코치를 따로 찾아가 조언을 받고 투구법을 교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새 스스로 스타 선수라고 뻐기는 그릇된 자부심이 그를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2군에라도 떨어진다면 더욱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나는 2군 선수다. 2군이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다. 이곳이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그렇게 인정을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다.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한다. 슬럼프는 인생의 동반자인 고독과 불안처럼 늘 함께한다. 중요한 건 슬럼프에 안 빠지는 게 아니라 가끔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인 그 슬럼프에서 가능한 한 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슬럼프 극복 후 성적이 올라갈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긍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변화는 다음에 다시 오는 슬럼프에 대한 완충장치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냥 자신의 자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해마다 시즌을 시작하면서 그가 그리는 목표 안에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그만큼 안 되면 남몰래 씩씩거리며 혼자서 연습하기로 작정하였다. 야구는 선수의 성적 관련 통계가 너무나 철저하다. 어떻게 하여 그 통계 숫자를 속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투수로서의 성적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밑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위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기복이 심했던 것이다. 그는 성적이 위에서 떨어지는 게 너무 싫었다. 한 해는 잘했다가 다음 해는 떨어졌다가 다시 한 해는 잘했다. 그렇게 되는 게 싫었다. 그 자신이 마음속에 목표로 정한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지표인) 방어율이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기복 없이 쭉 가고 싶었다. 물론 좀 무리하면 어느 정도 더 치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그렇게 되면 떨어지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떨어지는 것을 최대한 짧게 가자 그렇게 각오를 다짐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부상을 당하거나 아프지 않으려고 철저히 준비를 잘하자.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고 투구폼을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하자. 더 아프기 전에 빨리 알아서 치료하자. 또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자. 회식을 할 때도 끝까지 갈 분위기만 풍기고 그러나 끝까지 가지는 않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몇 번이고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심은 너무 쉽게 무너졌고 자주 반복적으로 슬럼프를 겪었고, 그래서 악마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잃어 버렸다. 딱히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고 온갖 걱정에 휩싸였다. 실수하면 어쩌지? 만약 이렇게 되면? 저렇게 되면? 어느 순간 갑자기 공을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던지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두려움이 더 큰 두려움을 낳고 있었다. 고통이 점점 커져서 나를 삼켜버리고 있는 거야. 도무지 버텨낼 수가 없어. 이제 그만. 야구는 그만이야. 야구는 그만이라고. 나이 탓인가? 체력이 고갈된 것인가? 벌써? 회복은 불가능할 것인가? 이러다가 2군으로 내려갈 것인가? 방출될 것인가? 병원에? 술을 마실까? 약을? 약효가 강한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주절거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다시 말하면 수다를 떨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늘어놓는 거야. 무언가 바늘 같은 것이 내장 안을 찌르는 것 같다. 그는 배가 아팠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며 팔다리의 통증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자주 오줌을 누고 싶고 구토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구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요란한 헛구역질만 나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는 수많은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된 운동장에 가서 마운드에 오를 수 없을 거야? 그러나 내 상처를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어디에서 도움을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도와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지 않을까? 안 된다. 비밀로 꽁꽁 감추어야 한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지.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면 절대로 안 돼. 초조해서도 안 되지. 함정에 빠져서도 안 돼. 후배들 앞에서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팀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자존심이라고, 자존심, 자존심 문제란 말이지. 나는 스타야, 스타라고. 경기를 하려면, 승리를 거머쥐려면 기가 살아야 한다.
그는 그때 너무 혼란스러웠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갈피를 못 잡았다. 그는 예리한 칼로 몸을 찔러서 긋기 시작했다. 고통이란게 어떤 것인지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흐르는 검붉은 피를 보며 흥분 또는 공포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2017-11-25 11: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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