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중편선> 삼각관계 (上)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7-09-01 11:01:31   조회: 397   
삼각관계


재판관에게 네 가지가 필요하다.
친절하게 듣고, 빠진 것 없이 대답하고,
냉정히 판단하고, 공평하게 재판하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기하학에서 삼각형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은 세 개의 점을 이으면 만들어진다. 각기 두 개의 점이 하나의 선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렇게 이어진 세 개의 선이 삼각형의 변을 형성한다. 삼각형에는 정삼각형, 직각삼각형, 두 변과 두 각의 크기가 같은 이등변삼각형이 있고, 이등변삼각형은 다시 예각삼각형, 둔각삼각형이 있다. 그러나 정삼각형은 같은 크기의 세 각과 같은 길이의 세 변을 갖추고 있으므로 조화를 상징하는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 모든 평면도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혼자 또는 하나가 아니다. 반드시 둘이 있고 그건 틀림없이 남자와 여자를 말한다. 사람 ‘人’ 자를 보라. 남자와 여자가 서로 기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상기해보라. 하지만 둘이 있으면 반드시 셋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남녀가 결합하면 몇 사람이 존재하는가. 세 사람이 존재한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식이 존재하지 않는가. 유대인들은 아버지, 어머니,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삼위일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삼각형인 것이다. 셋은 신이 선택한 수이기 때문에 행운의 수이다. 그러나 셋은 무한히 증식한다. 신이 최초의 인간들에게 번성하라고 명령한대로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어났으니, 지금 지구상 인구는 70억 명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 말씀이 있었던 태초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형사소송이란 역사적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한 인간의 지난한 삶의 단면을 정교한 언어로 서술한다는 의미에서 서사시이고 또한 소송 주체들의 내면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 끊임없이 극적으로 폭발하는 시적 특성이 나타나므로 서정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형사 법정은 변증법적으로 진행되는 그러한 논리의 세계라고 하기보다는 죄와 벌의 긴장관계를 팽팽하게 연결하는 신비한 힘이 작용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은 어두컴컴한 밤의 세계이기 때문에 절망적이면서 신비한 것이고, 시는 인간의 사고와 분출하는 감정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으므로 형사 법정은 시적 창조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이들 시를 휘갈겨 쓰게 만들면서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누구일 것인가? 누가 알겠는가? 전지전능한 신인지, 신의 섭리인지, 아니면 (어떤 운명이건 운명은 운명이므로) 운명인지, 아니면 단지 법률, 제도, 관습인지.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시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검사는 최초의 기소자이므로 시적 발화자이고 피해자의 수호신이고 그러므로 복수의 청부업자이다. 변호사는 죄인의 대리인이고 인권의 수호자로 자처하지만 실은 돈의 노예이다. 그렇다면 판사는 누구인가? 사법 권력의 화신으로 법정의 주재자이지만 지극히 냉엄한 비평가이고 잔인한 사디스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 속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작동하는 공판정에서 삼각관계는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양형을 둘러싸고, 둘은 웃고 하나는 울어야 하는, 또는 하나는 웃고 둘은 울어야 하는, 아니면 셋 모두 울어야 하는 긴장된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판정에서 그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비이성적인 인간사회의 현실에서, 그 축소판인 공판정에서 결코 동등한 삼각관계, 즉 정삼각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 *

서울지방법원 형사법정.
법정의 뒷문이 열리자 재판장을 선두로 우배석, 좌배석, 법원 서기 순서로 입장했다. 모두 권위의 상징인 거추장스러운 가운을 걸치고 있다. 재판장이 법대 가운데 의자 앞에 멈춰 섰고 배석 판사들이 그의 좌우에 자리를 잡았다. 법정은 그 엄숙한 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판사들이 자리에 앉자 법정 정리가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라고 말했고, 그제서야 방청객은 띄엄띄엄 자리에 앉았다.
법정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재판장이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으면서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로 방청석을 내려다본다. 벽면에 걸린 원형 시계의 분침은 10시 10분을 지나고 있다. 그는 컴퓨터 화면을 훑어보며 오늘 진행해야 할 사건들을 점검한다. 그러고 나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재판장 : 이제는 증거조사가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지난 기일에 예고한 대로 오늘은 반드시 결심을 하겠습니다. 구속만기가 다 돼 갑니다. 검사께서 구형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형사 재판은 지겨워, 정말 지겨워. 민사부로 옮기려면 아직 6개월이나 남았으니.
요즘 마누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불만으로 가득 차있지. 혹시 이혼을? 도대체 뭣 땜에? 걔는 자폐적이야, 온통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으니까. 어쩌려고? 무언가 잘 못 돼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이혼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가끔 심장이 쿵쾅거리고 속이 메스껍다.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살지 못하고…… 범죄가 넘쳐나고 있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그 때문에 재판을 해야 할 사건은 캐비닛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거야. 요즈음은 재판을 끝내는 사건보다 신 건이 더 많이 들어온다. 저절로 한숨이 새 나올 수밖에 없다. 재판을 빨리 끝내야지.
마음이 뒤숭숭해서 도대체 기록이 읽어지지 않아. 내 손아귀에서 기록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판사가 기록을 읽을 수 없다면…… 직업적 타성인지 매너리즘인지. 그 불투명한 순간에 대충 띄엄띄엄 넘긴다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되겠지.

검사 : 벌써 6개월이 지났다고? 재판이 끝난다고 하니 내 마음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두서없이 교차한다. 만약 사는 게 느끼는 거고 생각하는 거라면 말이다. 그리고 다시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나를 감싼다.
지금, 저 판사는 텅 빈 눈으로 멍하게 법정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번 사건은 공판 검사가 무능하고 불성실해서……? 재판을 대충 대충 하더니만 무죄가 나오고 말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너무 진술에만 의존했는데 법정에서 이를 번복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인가?
그 사건은 법리 오해도 수사 미진도 아니었어. 그냥 증거의 평가에서 법원과 검찰 간 견해 차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 자식이 무죄라고 해서 양심까지 무죄인 건 아닌 거야. 판사 역시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부족하다고 느꼈겠지.
그런데 그 판사는 자기가 뭐 인권 판사라도 되는 양 설치는 작자였지. 위에다는 유죄를 장담했는데 체면도 안서고. 금융조사 전문 검사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만 거야. 그리고 평가점수에서 3점이나 깎였지.
그래서 도저히 그 인간에게 맡겨 놓을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올 수밖에 없었지.
나를 믿고 이 사건을 배당한 거였어. 수사가 지지부진할 때는 부장검사가 도와준 거야. 윗선에서 돌려서 이야기하거나 은근히 눈치를 채게 하거나 하면서 수사에 간섭하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더욱 마음이 무거운 거지.
이 사건은 내가 직접 공판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 거야. 증인 신문이 아주 중요하거든.
이 사건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 3개월 동안 고생고생하면서 수사를 했는데. 얼마나 많은 야근을 했던가. 대포통장과 해외로 이채한 자금은 추적이 불가능했던 거야. 그래서 수사기술이 필요한 사건이었다고.
그 투자 자문사의 상무를 어르고 달랜 거지. 그 친구 겁을 주니까 사시나무 떨듯 지독하게 떨더구먼. 빼주는 조건으로 결정적인 제보를 받아냈지. 압수 수색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서류까지 받아냈던 거야.
그 친구를 보호해주면 나한테도 불리할 것은 없으니까 해외로 장기여행을 보내주었거든.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녀는 너무 우아했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어떻게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편두통과 불면증과 폐쇄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상처를 입었고 분노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선심을 쓰는 척 믹스커피를 타 주었지만 그녀는 마시는 시늉만 했다.
옛날엔 48시간 동안 조사했단 말이야. 그 시절이 좋았어, 그 시절이 그립구만. 그때는 밤새 조사하면서 심하게 윽박질렀지. 그랬으니 불지 않고 어떻게 배겨내겠어. 희한한 일이지만 대개 새벽 두 시쯤이면 어김없이 자백을 했다.
그런데 대화 시간이 중간에 끊기면…… 피의자를 설득시켜 자백하게 만드는데 시간이 부족하단 말이야. 그래서는 안 되는데…… 다음 날엔 마음이 쉽게 변하는 거야. 그러면 짜증이 나지. 마구 화가 나는 거야. 죽이고 싶도록 화가 난단 말이지. 왜 욕지거리가 안 나오겠어. 왜 때리지 않을 수 있겠어.
검사도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누군가는 인격 수사 운운했는데 정말 현실을 모르는 한심한 소리라고. 그렇게 해서 수사가 되느냐 말이지.
우리나라는 고소, 고발 공화국이란 말이지. 고소 건수가 너무 많은 거야. 무조건 고소를 하니까. 그래서 모든 사적 분쟁에 수사기관이 개입하게 되는 거지. 그러면 언제든지 수사기관이 국민들의 삶에 개입하게 되고 따라서 수사기관의 힘이 세지는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검사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니 오만하다. 거만한 검새는 항상 오버 액션을 하는데 어떻게 인격 수사를 할 수 있겠는가.
제발 좀 그만하라고. 제발……. 지겹다고……. 정말…….
그것들은 아주 치밀했단 말이지. 계좌 추적이 안 되니까 참고인 진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 그 역시 진술이 여러 차례 오락가락했지만…… 원래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진실에 다가가는 거지. 검사에게는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저쪽에서 부인하던 말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수사검사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언제나 검사로서 직업정신에 충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수사 의지가 중요한 거야. 수사는 생물처럼 살아서 꿈틀거리니까 말이야. 그러나 수사라는 게 100프로 완벽하게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계좌 추적에 실패한 것이 찜찜하고 증인들의 증언도 약간 엇갈렸지만 큰 문제점은 없다고 봐야겠지. 법정에서 하는 증언은 늘 그 모양이거든. 증인들의 증언은 언제나 그렇다.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앞에서 한 말을 번복하고 그러니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 인간의 기억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또 하나 저쪽에서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지. 그 계약서를 말하는 거야. 늙은 사무장 양반은 완전히 브로커이지. 변호사하고 50대 50으로 나눈다고 했는데 그 여우같은 양반 똑똑하기가 변호사 뺨을 치지. 그 양반 변호사법 위반으로 나한테 코가 꿰었으니까 계약서 사본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어. 그게 아주 중요한 보강증거가 되었거든.
나는 검사와 변호사가 천적 관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법의 지배라는 더 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저 변호사는 대학의 서클 후배이니까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잘 아는 사이인 것은 맞는 말이야. 술 마시고 광란의 밤을 보내는 서클의 후배. 그땐, 우린 철없이 젊었었다. 쟤도 술만 마시면…… 무엇을 증오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에 받쳐서 악을 고래고래 지르고 반쯤 미치지만 그래도 귀여운 친구였거든. 그때는 정의감도 살아있었고 낭만적이었지.
그러나 많이 변했어. 난폭한 세월이 해치지 않는 것이 무엇인들 남아 있겠는가.
뭐라고……?! 판사는 심판하는 인간이고 검사는 심판 받는 인간이라고? 그건 판사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지. 꽁생원 주제에…… 검사나 판사나 법적 자격요건이 똑같은데 우리가 꿀릴 게 뭐람.
판사도 훌륭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어서 매우 답답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검사를 선택했거든. 하지만 검사를 선택한 인간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한 구석에는 권력에 대한 욕구나 집착이 도사리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걸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법원에서는 공익의 대표자인 검찰을 우리가 힘껏 지원해주어야지 방해하면 안 되지 라고 생각하고 있어.
검사가 판사의 기질과 성향까지 파악해야만 할까.
저 재판장은 믿을 만한 거야. 검사들 사이에서 아주 평판이 좋은 거야. 정말이지, 믿을 만하지. 대부분 유죄이고 형이 무척 세니까. 그의 머릿속에 무죄는 없을 거야. 그는 인간혐오증에 걸려 있다고 봐야겠지. 교회에 다닌다고 하지만 가톨릭 냉담자가 아닐까? 맙소사, 할렐루야. 그렇다면 무신론자이고 회의론자가 아닐까? 그러니 내가 중형을 구형하면 내심 아주 좋아할 거라고. 그럴 거라고.
피고인, 이 자식 도저히 못 빠져나갈 거야. 내 손아귀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이 될 거야. 그렇다니까.
내가, 검사가 정의의 칼 맛을 보여주는 거야. 네놈이 당뇨에 심장병이 있다고 하였는데 안에서 골골하다가 죽어야만 하지. 저런 개자식! 악마 자식!
승부는 진즉 끝났다고. 너무 싱겁게 끝났단 말이야. 변호사가 되가지고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반대심문에서 핵심을 놓친 거라고.
증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흔적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변호사는 고개를 처박고 단조롭게 대본을 읽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증인은 변호사의 질문을 마음 놓고 무시할 수 있었던 거지.
변호사는 무능해. 네 놈은 쓸데없는 방어태세를 취했단 말이지.
또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나. 출퇴근이 가능한 서울 근교로 갈 수는 없을까. 호남선은 싫어. 누구처럼 나를 끌어줄 든든한 빽줄이 있어야 하는데……. 족보 있는 검사가 부러워.
검찰은 권력의 주구이거나 권력의 시녀인 거야. 정권의 충성스러운 파수꾼. 양심까지 마비된 자들이 거물 행세를 하는 거야. 마치 정의의 사도인 양 까부는 거지.
그럼 나는 누구란 말인가? 파수꾼의 파수꾼, 파수꾼의 들러리.
검사들은 인사에 굉장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나서도 다음 인사를 걱정하는 게 검사다.’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고 돈다. 그런데 파수꾼을 자처하는 높은 분들이 내 평가자료를 쥐고 있으니 이를 어떡한담.
어느새 내일 모레면 검사 10년차다! 나이는 어떻고!
지금쯤 훌훌 털어버리고 개업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마누라는 요즘 성화가 심하지. 애를 데리고 캐나다에 가겠다고…… 그래서 나더러 기러기 아빠가 되란 말이지. 이제는 생각할 때가 되었지 않은가? 이제는? 부장은 하고 나서…… 꾹 참고 기다려야 할까?
그때, 술자리이긴 했지만…… 높은 분이 말씀하셨지. 내가 높은 자리에 와보니까 알겠더라고. 승진을 해서 올라가면 그럴수록 넓게 보이더라고. 예전에는 법조문만 가지고 사건을 따졌는데 위로 올라가보니까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것이 참 많아지더라고.
지금은 그런 시대야…… 시대가 변했으니까. 권력은 총에서 나오는 게 아니란 말이지. 법치주의 시대가 도래하니까 권력은 검사의 칼끝에서 나오는 거지. 나는 지금 검사의 권위를 맘껏 즐기고 있는가? 캐비닛에 쌓여 있는 미제 사건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참에…… 전관예우를 받으면서 그냥…… 저 녀석처럼 말이야.

벌써 12월이다. 금년 한해도 저물었다. 아침부터 구름이 낮게 드리운 찌뿌린 날씨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비가 내리거나 첫 눈이라도 내릴 기세다. 막상 눈이 내리다가 비로 바뀔 지도 모르겠다. 습한 공기는 텁텁했다.
검사는 집을 나서면서 ‘나를 이토록 짓누르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곰곰이 생각했다.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머릿 속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재판이 끝나는 날.
나는 왜 홀가분하지 않는가? 지금 뭘 두려워하고 있는가? 구형량은? 결심을 했단 말인가? 무기징역?! 20년?! 10년?! 오늘 재판에서 검사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 마지막 순간을 고뇌하고 있는가? 피고인의 초췌한 얼굴에서 동요하는 감정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실제 그렇게 심각하게 고뇌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늘 했던 대로 하면 되는데 뭣 때문에?
그때 내 생활은 엉망이었다.
법대 친구들이 모두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시공부를 할 때 나는 끝없이 방황했다. 매일 혼자서 줄담배를 피우고 술만 마시고 잘 먹지도 않았고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활은 엉망이 되었고 몸은 점점 빼빼 말라갔다. 심한 대인기피증과 광장공포증에 걸려서 자학적이었고 자폐적이 되었다. 나는 그때 죽을 결심을 하였지만 결코 실행하지는 못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나에게 섬광과 같은 깨달음의 순간은 없었다. 그냥 내 친구들이 고시에 합격하여 환호작약할 때 어쩔 수 없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을 뿐이다.
그때 큰 맘 먹고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갔지만 고시합격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과 함께 끝내 합격하지 못할 거라는 본능적 두려움 때문에 몹시 시달렸다.
그러나 연수원을 수료할 때 변호사를 할 자신이 없었고 판사가 될 성적도 아니었다. 초급 검사 시절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형사부에서 그럭저럭 중간쯤은 갔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해서 조사부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번 사건만은 정말 열심히 했다.
내가 인간과 세상일을 티끌만큼이라도 알고 있을까? 내가 내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을까?
나는 연민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의 여위고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아니면 피해자를 대신해서 복수의 감정으로 그를 노려보아야 하는가? 사무적인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멀거니 바라보아야 할까?
아무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단조롭고 차가운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해야 한다.
검사는 상대방을 조롱하듯이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가 바닥에 발을 굳게 딛고서 일어섰다. 자신이 수사의 주체이고 공소권자이고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임을 자각한 것이다.
나는 검사다.
검사는 딱딱하고 굳은 얼굴로 잠시 건너편에 나란히 앉아있는 변호사와 푸른 줄무늬 수의를 입은 초췌한 얼굴의 피고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피고인의 애매모호한 눈빛과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다시 법정의 궁형 낮은 천장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알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검사가 말했다.
이제는 그 철면피한의 가면을 벗길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판사님이 그걸 벗겨서 엄중하게 단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피고인 정의경은 이 신성한 법정에서도, 수사 과정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지그재그로 애매하게 진술하고 자신의 허구적 논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가 쓴 모순투성이 진술서를 보십시오. 그게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자기 죄를 인정하겠다는 말 없는 긍정이겠지요.
한 인간을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시키고 파탄으로 몰아넣었으니, 이는 정신적 살인 행위입니다. 그러니 입이 열 개라도 무슨 구차한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였던가……? 무조건 사랑을 하면 배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불쌍한 피해자는 사랑의 배신 때문에 죽음보다 더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친 듯이 절박하게 사랑하니까 이를 철저히 이용해 먹은 것이죠. 지금 극도의 신경쇠약 때문에 정신과적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피해자의 진술조서를 성립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은닉해 놓고는 피해액을 변상할 생각이 추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눈곱 티끌만큼도 반성의 기미가 없습니다. 피해자는 그 막대한 재산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것입니다.
변호인의 의견서를 보면, 그건 모두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상당히 작위적이고 실질적으로는 창작에 불과한 소설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삼류 소설이지요.
그래서 중형 구형이 불가피합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3조를 적용해서 20년 형에 처해 주시고, 추가적으로 범죄수익은닉규제및처벌등에관한법률 제8조를 적용해서 황금에 눈이 어두운 자로부터 범죄 수익을 완전히 몰수해주기 바랍니다.

* * *

재판장 : 검사가 지금 살기가 등등하지. 검사로서 입증책임을 다했다고 자신하고 있는 거야. 저 검사는 제멋대로 20년을 구형하고 있는 거야.
피고인이 계속 검사의 질문에 묵묵부답했으니까 괘씸하게 생각했을까? 그런 사적 감정 때문일까? 피고인이 가담한 정도를 고려하면 검사는 오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재판부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수사가 끝나고 나서 그 결론으로 아니면 지금 즉석에서 임기응변으로 구형량을 결정한 것인가? 정말 제멋대로야. 이 사건에서 검사의 구형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증거는 충분하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지. 그런데 대법원의 양형조건을 고려는 한 것인지.
그런 걸 믿고 있겠지. 판사의 선고 형량은 구형량의 절반이라는 속설…… 우리는 검사의 구형이 얼마이면 대충 그에 때려 맞춰 정했다. 그러니까 실제 선고는 판사가 하지만 검사가 선고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검사에게 부탁해서 구형량을 줄이려고 하고……
누가 뭐래도 내가 이 법정을 지배하고 있는 거야. 법정 모욕과 저항에 대해선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하지. 어쨌거나 형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검사가 하는 것은 아니지. 이건 검사보다 판사가 더 높으냐, 또는 검사도 판사와 똑같이 높으냐의 문제란 말이지. 그러나…… 왜 법대는 높고, 그래서 판사가 검사를 내려다보느냐고, 그걸 검사는 깨달아야 할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나는 판사이거든. 판사란 말이야, 판사. 그건 아주 초보적인 상식인 거야.
과연 법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게 가진 자를 위한…… 그러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닐까?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어.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그건 헛소리야, 개소리야.
그러면, 검사와 판사의 형량에 엄청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률 전문가가 똑같은 법조문을 적용하는데 말이야. 그것도 관행이라고? 사법 불신의 원인이 아닐까?
그런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위 말하는 시국사건에서는 법원은 검사가 구형하는 대로 선고하지 않았던가. 오직 판결을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영혼이 없는 법 기술자에 불과했던 거지. 만약 내가 그 시절 판사를 했다면…… 나는 겁쟁이인데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검사는 잔인하고 판사는 인간적이라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오히려 판사는 비겁한 작자들이겠지. 어설프고…… 꾀죄죄하고…… 겁쟁이들.
우리는 재판이 끝나는 이 시점에서 심증 형성을 끝마쳤는가? 합리적 의심 없이 말이다. 6개월간이나 재판을 했으면서…… 정말 인내심이 필요한 지루한 재판이었다.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어, 실체가 도대체 뭔데? 진실은 무엇이고 어디에 꽁꽁 숨어있는가? 신이 아닌데…… 인간은 신이 아니지 않은가. 죄와 벌의 형평성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관습적으로, 자의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거야.
나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는 정황 증거 이외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무죄를 때릴 용기는 없었다. 대부분 피고인들은 유죄로 밝혀지니까. 옛날에는 가끔 자비의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는 유죄 판결을 수없이 선고한다. 유죄 판결을 선고할 때의 스릴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배석들은 뭐하는 거야? 배석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주심이 무슨 할 말이라고 있을까? 그렇지. 눈치를 보니까 재판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군. 지루하겠지. 나는 그들과 함께 심의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타협해야 한다.
그러나 암담한 현실은……? 배석은 판결에 있어서 각자 3분의 1 지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법률이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지분 전부를 스스로 부장한테 반납한다. 그래서 부장이 전부 결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들은 굴종한다. ‘부장님, 결정하신 쪽으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나도 그 시절 그랬던가?

변호인은 할 말씀 있으시면 마지막으로 하시지요. 짧을수록 좋겠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 재판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변호사는 검사의 20년 구형에 일순간 얼어붙었다. 법정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압박감을 느낀다. 어떻게 20년씩이나…… 검사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아 보라지……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기록을 뒤적이고 있는 법대의 판사를, 당당하게 앉아 위세를 떨고 있는 건너편 검사를, 법정 서기를, 딱딱한 나무 방청석에서 몸을 뒤척이는 몇몇 방청객들을 얼핏 바라보았다. 그는 옆에 앉아있는 피고인을 애써 외면한다. 다행스럽게도 피고인의 가족들은 재판 내내 오지 않았다.

변호사 : 형사소송에서 당사자주의는 헛된 이론일 뿐이다. 검사의 무자비한 공격 앞에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무력할 뿐이다. 저쪽의 막강한 힘에 이쪽은 항상 굴복한다.
변호사는 무력하다. 법정은 언제나 낯선 곳이다. 나는 법정에 들어올 때마다 온몸이 얼어붙고 긴장된다.
저 검사는 서클 선배이어서 전화까지 해서 부탁했는데 어떻게 20년을 구형할 수 있단 말인가. 요즈음 분위기에서 찾아가는 건 피차간에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구형하면 내 체면이 뭐가 되느냐 말이야. 정말이지 못해먹겠어.
그 서클은 이름도 없었고 뚜렷한 목적도 없었다. 그저 공부하기 싫으니까 모여서 노닥거리는 것이다. 우리는 거시기 클럽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느 날 어김없이 술을 마셨는데 동이 틀 때까지 남은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아버지는 지독한 알코올 의존증이었다. 치아의 절반은 이미 썩어서 빠져버렸고 나머지 절반도 누렇고 들쭉날쭉했다. 그 때문에 알코올성 신경장애로 일찍 죽었다.
나는 거시기 시절 술에 집착했다. 나는 아버지를 괴롭힌 술을 끝까지 마셔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변론에 집중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잡념을 집어치워야 한다.
그런데 말이야, 그 상무 놈은 해외로 빼돌리고…… 죽일 놈. 그러나 미꾸라지 같은 공범이 해외로 도망 가버린 것은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고 꼭꼭 숨어있어야만…….
피고인은 나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거야. 그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와 나 사이에 깊은 불신의 벽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 뛰어난 미모의 여자와 피고인의 관계는? 이경순? 혹시 불륜관계? 그의 말마따나 주식투자를 조언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단순한 고객이었지만…… 점점 깊은 관계로? 검찰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거든. 그 여자도 그걸 부인했다고 하니까. 어쨌거나 그 많은 돈을 날렸으니까 피해자인 거지.
내가 변호인인데 이 사건의 실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건 검사도 판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들은 애꾸눈이나 다름없어. 검사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점은 무시하고 불리한 점만 찾고 변호사는 유리하거나 정상 참작이 되는 쪽만 찾으니까. 하지만 판사야말로 기록에만 나타난 껍데기만 알고 있는 거지. 그게 판사의 한계란 말이지.
우리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귀신 곡할 노릇이네. 그 중요한 계약서가 사무실에 있었는데 그 사본이 어떻게 해서 검찰에 넘어간 거야? 모두가 글러먹었어. 저런 검사에 저런 판사라면. 사디스트들.
그렇다면 피고인의 형은 어떻게 되는 거야? 진짜 중형을? 뭘 기대할 수 있을까? 변론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알게 뭐야. 돈은 받았으니까 해야 하는 거지 뭐. 그러나 그럴듯하게, 아주 그럴듯하게 해야겠지.
이왕지사, 돈을 벌어야만 하니까, 큰돈을. 얼마나 벌어야 될까? 전관예우가 벌써 끝나가고 있어. 그러려면 날고뛰는 유능한 브로커가 필요하지. 크고 작은 사건을 물고 와야 하니까.
판사와 변호사는 전혀 다른 직업이야. 난 변호사란 말이지. 개뿔이나 무슨 정의감? 그게 밥 먹여주나.
우리는 견해 차이를 넘어서 정의의 관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거든. 다시 말하면 검사의 정의, 판사의 정의, 변호사의 정의가 다르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골프가 점점 안 맞고 있어, 계절 탓일까.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마음을 당분간 붙잡아 둬야…….

지난 6개월 동안 재판을 하시면서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금융계좌 추적을 위해서 신청한 그 많은 사실조회신청을 전부 받아주신 배려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추적이란 게 끝내 막다른 골목에서 막혀버렸기 때문에 피고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피고인은 무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사재판에 있어서 엄격한 증거의 법칙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고객을 소개하고 또는 자금을 유치해주고 그 수고비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검찰은 뒤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이 사건의 주범이고 핵심인물은 중국인지, 동남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이미 해외로 도피했는데 검찰이 무능해서 출국금지를 뒤늦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겠죠.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검찰은 금융계좌의 추적에도 실패했습니다. 방대한 수사기록 속에 결정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이 사건 공판에서도 계좌 추적을 하기 위해서 여러 금융기관에 수개월에 걸쳐 사실 조회를 하였지만 나온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돈은 전부 그 무늬만 화려한 벤처기업으로 입금되었고 피고인이 받은 돈은 자금 유치에 대한 수고비조로 받았기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증인들은 직접적으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역시 도저히 믿을 게 못 됩니다. 그들이 증언할 때 왜 저기 있는 검사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숨소리에서 왜 비린내가 풍겼을까요? 그들의 입에서는 왜 악취가 났을까요?
검사의 달콤한 회유, 너무나 달콤한 사탕발림에 끌려 이 법정에서 한 증언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검사 앞에서 충분히 예행연습을 했다는 말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이 과연 증언할 자격이 있을까요? 판사님은 인간의 희미한 기억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뚜렷한 기억일수록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이어서 결국 소설에 불과합니다. 더 나아가면 멜로드라마가 되겠지요. 그렇지요. 기억은 망각일 뿐입니다. 망각이란 말입니다. 이 모든 사건은 잊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잊히는 것 말고는 달리 써먹을 데가 없는 것이지요.
왜? 검사는 이 법정에서 끝내 원본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본만을 흔들고 있을까요? 어떻게 원본이 없는 사본을 증거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증거로 제출한 서류나 계약서 등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피고인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서류는 그 자가 작성한 것이지 피고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계약서 말입니다만, 피고인은 그 계약서에서 당사자도 아니고 단지 입회인에 불과하였습니다.
피고인이 범죄수익을 은닉했다고 하는데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이 샅샅이 찾아봤지만 숨겨 논 재산은 없었습니다. 몰수형 구형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가령 유죄라고 심증을 굳히신 경우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의 모든 정황을 살펴보면 피고인이 역시 피해자인 점을 감안하시고, 피고인이 어쩔 수 없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초범이고, 내심으로는, 그의 영혼만은 많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참작해서 집행유예를 선고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 *

재판장 : 돈을 많이 받아먹은 변호사의 면피용 그럴 듯한 변론이군. 피고인과 그 가족들이 들으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궤변에 불과한 거야. 나중에 변명을 하겠지. 변호사는 최선을 다하여 할 만큼 했는데 판사가 그 모양이었다고.
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변호사가 없어야 하는가? 그 곳 주민들은 변호사란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인간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저 피고인은 그 흔해 빠진 탄원서도 쓰지 않았어. 차라리 잘됐지, 읽기 지겨운데. 그런데 저 변호사는 그 내용이 뻔하디 뻔한 변호인 의견서라는 것을 써냈지. 내가 거기에 속아 넘어 갈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걸. 뭐 억울하다고? 뭐가? 가사…… 뭐가 어쨌다고?
이 세상에 지금 정직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인가. 가령 정직이 있다고 해도 그게 최선의 방책일 수 있을까. 그러니까 거짓과 기만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 거지.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란?
나는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서 오랫동안 판사 노릇을 했지만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저지른 오판이란 죄를 어떻게 감당한담…….
무죄추정주의는 아주 오래 전에…… 아마 탄생한 순간부터 진즉 죽어버렸다. 그렇지 않은가. 그건 범죄자 인권을 외치는 위선자들의 요란한 구호에 불과한 거지. 우리들은 모두 유죄추정주의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다. 기소된 작자들은 다 인생에 실패한 죄인이 틀림이 없으니까, 설령 이번 죄가 무죄라고 하더라도 그 동안 저질렀지만 들키지 않았던 죄 때문에 어쨌거나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
유죄이건 무죄이건 그 따위 논리쯤이야 얼마든지 만들면 된다고. 그에 걸 맞는 법률해석은 나중에 갖다 붙이는 거야. 그게 그거라고. 판사가 양심을 저버리면 그런 건 식은 죽 먹기야.
그런데 저 변호사는 또 무죄 타령이군. 저 자는 언제나 무죄 주장이야. 연쇄 살인범에게도 무죄 주장을 할 거니까. 그리고 이 신성한 법정에서 선서한 증인이 한 증언을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깡그리 부정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그건 형사소송법을 능멸하는 짓이지. 증언의 신빙성은 내가 판단하는 거야, 바로 내가. 나는 판사란 말이지.
변호사들은 집행유예를 어김없이 상투적으로 들먹이고 있는 거야. 나를 지금 잘 설득하고 있는 거냐? 그게 옳은 변론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나 역시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저 변호사, 단독판사를 그만두고 개업하면서, 그때부터 이미 브로커 쓴다고 소문이 났던데. 유능한 브로커를 몇 명씩이나 두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돈을 벌어서…….
승진은 무슨, 누가 승진시켜 준대?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뭐 대수인가? 법원 행정처를 축으로 한 법원의 관료주의란…… 나는 그 쪽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나는 언제쯤 단독 개업을 해야 하나? 요즘은 전관예우가 예전만큼 못하니 차라리 대형 로펌으로? 오라고 하는 데가 있긴 있을까?
단독 재판을 처음 하던 날이 생각나는군. 나는 그때 얼떨떨하다가 그대로 얼어버렸지. 방청객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순간. 머리가 빙빙 돌고 법정도 함께 돌아버렸지. 벽들은 뒤틀리고 천장은 바닥이 되고 바닥이 천장이 되고 말이지. 그러니까 목소리가 잠겨서 잠시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었지. 어렸을 적 일이지만 사람들 앞에만 서면 덜덜 떨며 말문이 막혀버렸거든.
그런데 벌써 20년이나…….
판사가 되려는 자는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육체를, 마음과 정신, 감정, 지성, 영혼을 점검하고 이해해야 한다.
내가 자기 직업을 언제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어떤 종류의 죄책감을 느꼈던 일은? 나는 형을 선고하면서 쾌감을 느꼈던가? 아니면 고통을 느꼈던가? 언제 자신에게 의혹을 품어본 일이 있었던가? 한번쯤 법대에 앉아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감 때문에 셔츠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은 경험이 있었던가? 나는 가끔 악몽을 꾸는 일이 있었던가? 그 악몽 때문에 불면하는 밤은?
나는 국가의 대리인인가? 나는 법복을 입고 높은 법대에 앉아있다. 그러나 법복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무대 위에서 지그재그 춤을 추는 광대이다. 판사라는 직업은 나를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피폐하게 만든다. 누굴 위한 재판이란 말인가? 피고인을 위한, 국가를 위한 재판? 아니다. 나를 위한 재판이다.

피고인, 당신이 무죄랍니다. 만약 아니라면, 당신의 영혼을 들먹이며 집행유예를 선고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빌고 있군요. 마지막으로 진술하시지요. 할 말이 있다면 말입니다.

피고인 : 이쪽 사람들은 제멋대로 침묵을 묵묵부답이라고 하더구먼. 너희들이 침묵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는 하는 거야…….
그런데 저 검사가 어떻게 저럴 수가? 다 자백하면 잘 봐주겠다고 끈질기게 회유하더니만, 그거 별 것도 아니야,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그래봤자 경제사범이고 너는 하수인으로 이용되고 푼돈이나 받은 종범에 불과하니까, 피해자도 돈에 눈이 어두워 몰빵했으니까, 대충 집행유예가 나올 거라고 했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런데 20년을 구형하고 막대한 재산을 숨겨놨다고 하지 않나? 내가 주식 투자를 하고 도박을 하면서 다 날렸다고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진술했었다고.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네…….
나는 그때 구치소에서 별을 보고 검찰청으로 나갔다가 별을 보면서 돌아왔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수갑을 채운 채 몇 시간씩이나 벽을 보고 서 있게 하는 등 심한 모멸감을 주었다. 그러므로 굉장히 불안한 심리 상태에 있었고 집중력과 체력이 현저히 고갈되었다.
어느 날 부장 검사가 자기 방으로 불렀다.
잘 불라고…… 수사라는 게 코에 걸면 코걸이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야. 우리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하면 얼마든지 봐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당신 와이프를 소환할 수도 있어.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렇게 불러서 하루 종일 이것저것 다 물어볼 수 있어. 그러면 와이프 심정이 어떻겠어?
그리고 말이야…… 당신 집을 다시 한 번 압수수색할 수 있거든. 집안을 홀랑 뒤집어서…… 애들 앞에서 진짜 개망신을 주는 거지.
이랬다저랬다 하면…… 검사를 노리개로 아는 거니까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그게 알고 보니 나를 옭아매서 교묘하게 사람을 잡는 반은 치사한 공갈이고 반은 협박이었다.
변호사는 말했다.
검사한테 미운 털 박혀서 어쩌려고. 무조건 빌어라. 별 수 없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서에 꾹꾹 눌러서 지문을 찍었다.
검사가 말했다.
법정에 가거든 무조건 증거에 동의하란 말이야. 변호사는 헛개비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부동의하면 사내답지 못하는 거야. 재판장이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겠지.
재판장은 ‘죄를 지은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라고 생각하겠지. 그러고 나서 “재판을 끌자는 거냐” 라고 힐난할 거야. 그러니까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
어떻게 하면 저 비열한 인간에게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복수의 화신이야. 이번 사건도 복수 때문에 일어난 거지. 내가 언젠가 나가게 되면…… 그때는 변호사를 하고 있겠지. 찾아가서…… 다짜고짜 이 새끼야! 날 알아볼 수 있겠어! 내가 누구지! 그러고 나서 어떻게 처리한담……?

* * *

나는 마지막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생각을 정리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이 사건은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자 공범들이 도망가면서 자기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돈은 내가 전부 가졌다고 떠넘기며 그 여자를, 엉덩이가 탱탱한 그 자존심 강한 여자를 부추겨서 고소를 하면서 시작됐으니, 그 일당을 잘못 관리한 내 잘못이기는 하다.
그들은 당초에 맺었던 철석같은 약속을 어긴 것이다. 자신들은 열심히 연구와 실험을 계속했고 모든 투자금은 마지막 실험을 위해서 해외 구좌로 송금하였는데 나는 단지 투자자를 소개해주고 소액의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고 나서 미국 연구소에 의뢰하여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마지막 단계의 실험이 지체되고 있다고 변명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실험 지체를 핑계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 연구소장이 말했다는 것이다.
이건 순전히 그 인간 때문입니다. 자금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요. 자금관리를 그가 했거든요. 배달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으니 마지막 결정적 단계에서 마무리가 안 되는 거죠. 그게 끝나야 특허출원을 하는데 출원을 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정의경이가 모든 걸 망쳐놓은 것이죠.
나쁜 자식! 개자식!
그러나 그들이 당초 약속을 어기고 욕심을 부렸지만 내가 많이 양보해서 공평하게 나눴으니 분배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없는 거였다. 하지만 그들이 배반했다. 예정되어있던 모든 시나리오가 어긋나버렸다.
나는 긴급 체포되었고 바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나는 그때 이러한 사태를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을까?
그걸 이해할 수는 있다. 그 사기 전과범은 동물적 감각으로 무슨 낌새를 눈치 챘던 것일까? 만약 수사가 시작되면 자신들 역시 꼼짝없이 엮이게 되니까 나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일찌감치 해외로 삼십육계를 한 것이다. 애시당초 그들을 믿은 내가 바보라고 할 수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그리고 어떻게 철석같이 믿었던…… 믿는 근거는 깜짝 놀랄 만큼 꽤 많은 돈을 주었으니까…… 그 상무가 유리하게 진술을 해주기로 한 철썩 같은 약속을 어기고 해외로 내빼다니. 더러운 세상에 믿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별게 아니지. 중요한 사항은 나 혼자 결정했으니까 말이야.
일반적으로 보자면 피해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실체는 무엇이던가? 그자들은 황금을 쫓던 자가 아니던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누굴 탓할 수 있겠어. 법이 인간의 탐욕까지, 더러운 욕망까지 보호해야만 하는 거야?
저게 내 변호사 맞아.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줬는데……. 무슨 마지막 변론이 이래. 너무 뻔한 소리 아닌가. 검사가 무기를 구형했는데…… 판사는 콧방귀도 안 뀔 거야.
그 늙은 사무장이 자기 변호사는 판사 출신이고 무죄를 잘 받아낸다고 해서…… 무죄 전문 변호사라고 해서. 아직도 전관예우를 듬뿍 받고 있다면서 무죄를 장담했는데…….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반신반의하자 두고 보라고,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집행유예보다는 무죄가 훨씬 쉽다. 판사가 무죄라는데…… 누가 토를 달 수 있겠어.
그런데 압수수색을 피하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서 잘 보관하라고 건네 준 계약서가 어떻게 검찰에 넘어갔느냐 말이야. 그 계약서에 뭐가 들어있었던가. 그걸 도장 찍으라고 들이민 것은 그 여자 쪽인데…….
그날 투자 협상은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계약서는 그 결과물이었다. 그녀는 계약서를 내게 맡기면서 말했었지.
애정도 없는 돈 많은 늙은 회장을 내가 먼저 차버린 거야. 정신은 천박하고 육체는 빈약했지. 내가 그랬다고. 그래서 이혼을 한 거고. 나에게는 평생 처음인 사랑인 거지. 모든 게 그 신파조의 사랑 때문이야. 나의 사랑만큼은 의심해서는 안 될 거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런 포악한 짓을 할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잘 알아둬야 할 것이 나는 칼립소가 될 수는 없지. 그녀는 불사의 여신이지만 나는 인간에 불과하니까. 널 놓아줄 수는 없어. 절대로…….
나는 변호사의 제지를 무릅쓰고 그녀의 검찰 진술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증인으로 나와 법정에서 마주치는 일만은 피해야만 했다. 이 법정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와 변호사가 말싸움을 벌이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의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고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 쳐다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외면해야? 한 때는 맨살을 비벼대며 그토록 사랑했으면서 말이다.
나는 지금쯤 그녀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리차드 반필드의 명언을 인용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거기에 함께 살고 있다.
2017-09-01 11:01:31
121.xxx.xxx.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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