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작가란 무엇인가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6-05-26 13:24:09   조회: 503   
작가란 무엇인가

변호사 유중원

(문) 작가란 무엇인가요? 혹은 작가란 누구인가요?

(답) 글쎄요. 쉽게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말해서 문학이나 예술의 창작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작가라고 하고, 저작자의 준말인 저자란 책을 지은 사람, 그래서 (예술 작품이 아닌) 일반적인 책을 쓴 지은이를, 필자란 사전적으로는 글이나 글씨를 쓴 사람을 말하지만 널리 논문이나 에세이 등을 쓴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작가란 창작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고 여기서 창작이란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므로 작가란 ‘창조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많은 학술 논문과 판례평석, 에세이, 법학 전문서, 기타 글 등을 썼으므로 필자 또는 저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창조적인 작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작품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또는 어떻게 해야만 창조적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말했다. ‘무엇도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어딘가에서 전생을 살았지 않았겠는가.’) 어쨌거나 그건 현명한 독자들이 판정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그 알량한 저자와 현명한 독자의 지위를 전복시킨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과 예술작품을 창조적 행위의 산물이라고 보았던 전통적 관념을 무시했던 미셸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 갑자기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있었는가요?

(답) 2007년에 작은 로펌 소속 변호사였습니다. 그 해 여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그냥 소설을 끄적이기 시작했지요. 작가가 되려는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단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에피퍼니epiphany가 불현듯 나타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소설 쓰는데 특별히 교육을 받은 일도 없었고 습작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요.
다만 그때까지 너무 많은 소설을 읽었지요. 내 삶이 너무 지겨운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나는 신경안정제로 독한 술을 밤새 마셨고, 정신이 말짱해지면 대게 소설을 읽었거든요. 나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막연히 한 번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모든 것은 잉태기를 거친 후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습니다.
내 나이 60을 넘어서니 이제야 철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고 세상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논어의 六十而耳順이라는 경구가 비로소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할까요. 작가란 작가 자신이 내면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숙해야만 세상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상극하는 모순된 목소리와 세계관들이 생생하게 얽히고설키면서 좋은 소설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내 손을 바라보며 시간이 없다고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은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으니, 나의 방언으로 내 글을 써야겠다고 갈망한 것이지요.

(문) 법조인으로 30년을 살았는데 그게 소설 쓰기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 법조인으로서 지난 30여 년간은 진실과 허위, 법정에서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똑같은 말들의 반복이었습니다. 그 닳고 닳은 말들 속에 언어의 간결함과 아름다움, 침묵의 언어, 언어의 정수인 은유는 없었지요. 관료주의와 매너리즘, 자기 기만, 자기 연민과의 기나긴 싸움이고 패배의 시간이었습니다.
변호사로서 사물과 현상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과부적의 일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여기서 자세히 밝힐 수 없는 몇 가지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가끔 준비서면에 소설을 써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건조한 법률용어로 서술해야 하는 소장과 준비서면, 법률문서 등과 학술논문이나 판례평석, 법학 전문 책들을 쓰는 스타일과 문체는 소설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요. 문학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적인 플롯의 구성과 문체를 쓰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독자와 비평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낯설게 만드는, 우리가 흔히 문학성이라고 일컫는 소설을 꽁꽁 묶고 있는 소설의 고유한 구조, 문장의 특수한 구성이나 어휘의 독특한 배치, 문체의 고유한 리듬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소설은 명쾌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게 아닙니다. 작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어야 하거든요.
작가는 이야기와 관련해서 원하는 것을 전부 끌어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그대로 다 표현 할 수도 없고, 그만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이 꼭 필요한지, 또는 전혀 불필요한지,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 자신의 소설 작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또는 작가적 자세 같은 거 말입니다.

(답) 전에도 어떤 기회에 밝힌 바 있습니다만…… 입체파 화가들처럼 입체적 플롯, 자기 내면이 강한, 고독한, 특별한 성격의 작중 인물, 인간 삶의 근원적인 것에 물음을 던지는 주제, 무엇보다도 나만의 독특한 컬러를 가진 미학적이고 섬세하고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문체에 집착합니다. 물론 산문에서 서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문에서 소설과 시의 중간쯤인 서정성이 풍부한 쓸쓸한 문장을 쓰려고 하지요. 내가 약간 멜랑콜리하거나 센티멘탈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언어의 아름다움과 기묘함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 보들레르는, “…… 우리 중에 야심으로 충만했던 순간에 시적 산문이라는 기적을 꿈꾸어보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라고 말했습니다.)
문장에서 리듬은 소리와 침묵의 엇갈림이고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E.M.포스터는 ‘소설의 이해’에서 리듬과 반복과 변화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글 전체를 소리만으로 채우면 안 되겠지요. 음악에서 휴지부가 필수적인 것처럼 휴식부도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글에서 리듬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소리에 둔감하고 음악적 소양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적절한 단어와 글귀는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해서 단순한 레토릭이 아닌 (인간의) 소리와 색채와 냄새를 가진 살아있는 문장과 문단을 만드느냐는 것이지요. 단어는 혼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단어는 문장 안에 있을 때만, 문장은 문단 안에 있을 때만 그 의미가 충만합니다. 단어들을 조합해서 의미를 굴절시키고 풍요롭도록 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는 작가들의 서정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문체가 정신착란과도 같은 숭고한 경이로움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 것은 확실히 잘못이다. 위대한 문체는 명징한 논리로 만들어 진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예술적 영혼을, 온전한 애정을, 모든 증오를 집어넣은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설 쓰기에서 작가는 얼마나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작가는 작중인물들의 삶을, 운명과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허구가 아니고 모두 진짜 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작가적 진실성으로 독자를 현혹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매지요. 여기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허구로 지어낸 모든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것을 고안해 냈다면 그것이야 말로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허구로 지어낸 것이 어떤 의미와 결부되어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장르소설이 아닌 이상 문학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는 작가는 사회적 제도와 관습, 전통, 불문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그러니까 아무런 제약 따위는 없이 무작위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오랜 직업적 습성 탓인지 유럽에서 한때 유행했던 네오리얼리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에는 다른 예술의 형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 있습니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자기 세계를 창조하니까 창조주, 신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허황된 소리에 불과한 영감이 아니라 쓰고 싶은 강렬한 욕망 혹은 써야한다는 병적 강박과 함께 끈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말한 ‘바늘로 우물 파기’처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편집증 환자처럼 쓰고 또 쓰고,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합니다.


(문)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고 출판은 어떻게 하나요? 지금 직업적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가요? 다시 말하면 작가로서 어떤 종류의 수입이 있는가요?

(답) 작가가 책을 출판하는 일은 참으로 고달픈 일입니다. 어느 출판사가 무명작가의 그렇고 그런 원고를 선뜻 받아주겠나요? 책을 낼 때는 유쾌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건 작가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나의 간절한 소망인 즉 내가 조금만 유명해지고 그래서 새 책을 내면 몇 천권 정도는 팔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출판사는 손해가 나지 않으니까 책을 내는데 부담감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변호사 업무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늘 불편한 마음으로 그 낯선 법정으로 들어가야 하지요. 그게 밥줄이니까요. 그러니까 법정은 가식과 위선이 판치는 곳 아닙니까?
지금까지 소설을 쓰고 책을 냈지만 단 한 푼의 소득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인 새뮤얼 존슨은 ‘돈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책을 쓰는 사람은 얼간이 밖에 없다’라고 말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직업적인 작가, 또는 전업 작가라고 할 순 없습니다. 현재의 여건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지요. 나는 지금 소설을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닙니다. 내 소설은 단지 쓰이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법조계 친구들은 한결같이 경멸적인 시선으로 문학을 바라봅니다. 누가 한가롭게 소설책을 읽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문학은 쓸모없는 천덕꾸러기인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는 한심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무관심과 천대를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문단과는 한참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세계는 오랫동안 법조계였고, 그쪽과는 아는 사람도 없고 교류할 기회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편견일 수도 있겠는데, 그쪽에서는 이방인 또는 엉뚱한 침입자 취급을 하지 않을까요. 혹시 빈정거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호사 주제에 무슨 소설을 쓴다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한편 아쉽기는 합니다.

(문) 작가가 글을 쓰면서 느끼는 어려움이랄까? 고통은 어떤가요?

(답) 모든 창작자의 공통된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오늘도 백지를 마주하고 앉아서 망연자실한 채로 절망감을 느낍니다. 창작의 열정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요.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자기 회의 때문에 괴롭습니다. 소설을 완성해서 끝냈다고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는지 아세요?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초라한 작품에 대해 어떠한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일은 아주 좁은 공간, 그러니까 감옥 같은 밀실에서 매일 혼자서 해야 하는 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얼마나 지겹고 지루하겠습니까. 그러나 작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쓰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작가로서 살아남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선 작가 자신이 납득하는 것을 써야만 합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게 가능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부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 작가는 독자의 재미를 위해서 아니면 독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가요?

(답) 몇몇 독자들은 내 소설은 깊이는 있으나 너무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소설이 재미없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지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교훈을 말할 처지는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중차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문학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을 전달하는 걸까요? 약간의 의미를 또는 무의미를, 다시 말하면 의미의 결핍을 전달하려고 시도는 하겠지요. 이 경우 무의미가 뜻 깊은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무명작가이기 때문에 잡지사나 출판사로부터 뭘 써주세요 라고 부탁받는 일이 도대체 없습니다. 그래서 마감시간 같은 것에 쫓길 일이 없지요. 그리고 독자가 거의 없다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를 상정하고 그가 읽기를 바라는 소설을 쓰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나를 위해서 쓴다는 것이 되겠지요. 자기 치유 혹은 자기 정화를 위해서 말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의 작업이란 글쓰기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 사랑 이야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공포로 떨게 만들거나 폭소를 자아내는 이야기를 씀으로써…….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매일 철저하게 진지함으로 무장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그럴듯하긴 합니다. 그가 인기 있는 대중작가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2016-05-26 13: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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