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중편선> 인간의 초상 (下)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6-05-26 11:08:58   조회: 623   
에필로그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식을 키우며 먹고 살려고 분투하는 사이 세월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빨리 지나가 버렸다. 아버지의 처지가 바로 그런 것이다. 처자식이 딸리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치사한 것도, 부당한 것도 꾹 참아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자신의 신념을 고수할 때와 굽히거나 버릴 때를 아는 것인데) 필요하다면 이념도 신념도 헌신짝처럼 버려 버리거나 재빨리 바꿔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란 참으로 좋은 약이다.
나는 2000년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구닥다리 구시대의 인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촐랑거리는 신시대 인간도 아니다. 완전히 구세대에 속하기에는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이고, 신세대에 속하기에는 너무 일찍 태어난 것이다. 나는 원래 진보적 낙관론자였으나 당연히 오랫동안 흔들렸다. 그래서 한때는 더할 나위 없이 철저한 비관론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민주 투사도, 좌파도, 운동권도, 이데올로그도 아니었다. 1970년대나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그 엄혹한 권위주의 체제에 대해 아무런 반감도 저항도 없이 순응했으니 시대의 흐름이나 상황은 나와는 무관했다. 그랬으니 형무소나 심지어 경찰서 보호실에도 가본 적이 없다. 나의 오직 관심사는 내 개인사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은 퇴행성 관절염이 조만간 생길 가능성이 있는 나이 탓에, 이마에는 자잘한 주름들이, 양쪽 볼에는 쭈글쭈글하다 못해 깊은 골이 패이고, 올챙이배처럼 배가 튀어나오고, 온몸은 군데군데 점점 커져가는 검버섯이 독버섯처럼 나있고, 다리와 팔은 점점 가늘어져 가고, 머리가죽에 들러붙은 머리털이 온통 하얘진 탓에 보수적 낙관론자가 되었다. 나이란 그런 것이다.
그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나는 진즉 그 옛날 그 시절의 나와는 연결 고리가 끊어져있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남김없이 잊히는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기억에 크고 작은 구멍이 뚫리면서 그저 조금씩, 하나씩 부스러져서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잊게 된다. 절대 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도 너무 빨리 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언제 죽음을 갈망했던가. 중요한 건 인생이다. 아! 아름다운 인생이여. 삶에의 의지. 그러니 이제는 그 과거의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까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가정생활은 원만하여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으니 매일 명랑하고 유쾌하다. 내 인생의 과정은 행복과 불행이 뒤섞이면서 어느 정도 균형을 잡은 것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수도승처럼 살 일이 있는가.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시쳇말로 하는 그런 행복이라면 정말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건 구제불능의 행복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무장해제된 것처럼 정신적 고뇌는 나날이 희미해지고 지워지기 시작했다. 내 삶이 육상선수처럼 빨리 달려가고, 먹이를 낚아채려고 빠르게 내려오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는데, 지금 가혹한 시험을 하여 자신을 괴롭힐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단테는 나이 35세쯤에 ‘우리 삶의 노정 중간’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나는 지금 산술적으로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삶의 노정에서 중간보다 훨씬 멀리 와 있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은 지혜가 있거나 총명한 것이 아니라 단지 노회하고 능구렁이가 다 되었을 뿐이므로) 나는 요즈음 필요할 경우 다소간 권모술수와 감언이설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오히려 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를 해서 재산을 많이 모으는데 관심이 많다. 돈이란 이 정도면 충분하지, 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살기 위해서 건강식과 값비싼 보약을 열심히 먹고 있다. 그렇지, 오래, 오래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손자들이 크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술은 더 이상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다. 술을 마셔도 즐겁지 않고 건강만 해치는데 그걸 왜 마시겠는가.
내 삶과 인생이 점차 해지고 스러져가고 있으니. 나는 소멸의 과정 중에 있다. 하지만 나를 점점 잃어간다고 해도 여전히 나 자신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2016-05-26 11:08:58
121.xxx.xxx.160


닉네임 :  비밀번호 :  자동등록방지 :    


번호
제 목
작성자
첨부
날짜
조회
117
  <유중원 대표 단편선> 탄원서   유중원 변호사   -   2017-12-08   7
116
  유중원 변호사의 학술논문 및 판례평석 목록   유중원 변호사   -   2017-12-02   18
115
  유중원 변호사의 말   유중원 변호사   -   2017-11-25   23
114
  <유중원 대표 중편선> 유혹 (下)   유중원 변호사   -   2017-11-25   14
113
  <유중원 대표 중편선> 유혹 (上)   유중원 변호사   -   2017-11-25   23
112
  <유중원 대표 중편선> 연쇄살인범?! (下)   유중원 변호사   -   2017-10-21   57
111
  <유중원 대표 중편선> 연쇄살인범?! (上)   유중원 변호사   -   2017-10-21   52
110
  <유중원 대표 중편선> 삼각관계 (下)   유중원 변호사   -   2017-09-01   96
109
  <유중원 대표 중편선> 삼각관계 (上)   유중원 변호사   -   2017-09-01   103
108
  (유중원) 작가의 말 [5]   유중원 변호사   -   2017-08-18   141
107
  <유중원 대표 단편선> 귀휴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47
106
  <유중원 대표 단편선> 마늘밭의 비밀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40
105
  <유중원 대표 단편선> 가장 완벽한 순간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35
104
  <유중원 대표 중편선> 외톨이 테러리스트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51
103
  <유중원 대표 중편선> 명품시계 수집가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62
102
  <유중원 대표 단편선> 찍새와 뽀찌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53
101
  <유중원 대표 단편선> 살인의 추억 (혹은 일명 ‘태완이 법’)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34
100
  <유중원 대표 단편선> 대리부 代理父 혹은 代理夫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62
99
  <유중원 대표 단편선> 제92조   유중원 변호사   -   2017-07-07   128
98
  <유중원 대표 단편선> 자백   유중원 변호사   -   2017-05-09   188
제목 내용 제목+내용 이름
 1 | 2 | 3 | 4 | 5 | 6 
Copyright © 2017 대한변협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koreanba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