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중편선> 결별의 기억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6-05-26 10:56:44   조회: 554   
결별의 기억


삶에 필요한 것은 기억력이 아니라 망각 능력이다.


심현숙은 임신 초기 배 속의 태아가 잘 자라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또 임신 초기 징후들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어서 처방을 받기 위해 방배동 빌라가 밀집해 있는 동네 어귀에 새로 지은 번듯한 5층 건물의 2층에 자리 잡은 ‘김영준 산부인과 의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임신이에요. 초음파 검사 결과 착상이 잘 됐습니다. 그런데 첫 임신이고 나이가 많기 때문에 상당히 신경 써야 할 거예요. 까닥 잘못하면 유산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죠?”
“우선 영양이 중요해요. 임신하면 칼로리와 단백질의 요구량이 증가하거든요. 채소류, 과일, 유제품, 생선, 육류를 많이 섭취하세요. 또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지요.
근육의 강도를 유지하고 유산소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주당 3~5회 정도 30분 이상 운동을 하세요. 수영, 활발하게 걷기, 자전거 페달 밟기, 미용체조 등이 알맞겠죠.
지금 증상이 심한 요통과 좌골신경통은 임신 중에는 매우 흔한 일반적인 증상이에요. 변비, 현기증, 피로감, 빈뇨 증상도 있고, 입덧도 심하다고 하셨죠. 그런 증상을 완화시켜주는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시간을 지켜서 잘 복용하세요.
정기검진을 위하여 당분간은 2주일마다 병원에 오셔야 합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아시……”
그가 활짝 웃었다. 희고 고른 치아가 드러났다. 그 잘생긴 외모의 젊은 의사는 첫날부터 너무 너무 친절하였다.
그녀는 병원에 올 때마다 여러 차례 의사 선생님에게 자신의 자궁을 내보이면서 진찰을 받는 과정에서 느꼈던 수치심은 곧 사라졌다. 한 달이 지나면서부터 오히려 병원에 가는 것이 자꾸만 기다려지고 가슴이 설레기까지 하였다. 그녀의 감각기관은 그가 풍기는 풍성한 남자의 냄새를 예민하게 맡을 수 있었다. 그 달착지근하고 저속한 느낌의 체취는 최음제처럼 외설적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마음을 졸이면서 젊고, 잘생기고, 부유하게 보이는 의사에게 정중하고도 은근한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매번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꼭 회신 바랍니다.」
그 젊은 의사도 곧바로 그녀의 핸드폰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 당시 그는 병원일이건, 집안일이건 모든 것이 권태롭고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 위장한 무관심으로 그녀를 대하였지만 그녀가 먼저 절박하게 접근해오는데 이를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눈에 띄는 곱상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고 예뻤으며 부자처럼 보였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의 날씬한 몸매는 부드럽고 육감적인 향기로 감싸여 있었다. 물실호기였다.
그녀가 진찰실 문을 나설 때면, 벌써부터 몸을 해부하듯 그녀의 뒷모습을 훑어보고, 그 성애 찬미자의 칙칙한 시선은 그녀의 엉덩이를 집요하게 집적거리고 있었다.

2. 심현숙은 그 당시 관악구에 있는 신설 사립 중학교의 음악 교사였다.
그녀의 부친은 그 품행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만은 매우 고루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 집에서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날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그녀가 현숙한 여자로 성장해서 현모양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이름을 ‘현숙’이라고 지어줬다. 물론 그녀는 여자 고등학교 시절부터 벌써 그 이름이 구태의연하고 촌티 난다는 이유로 매우 싫어해서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불평을 해댔다. 그녀는 그 유치한 이름 대신 스스로 길거리 작명가가 지어준 ‘심지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녀는 2남 1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순탄하게 자랐다고 할 수 있다. 막내로 부모님과 오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니,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발랄하고 깜찍했으며 당돌하였다. 겉으로만 보면 그랬다. 그러나 그 집안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서울 시내 유명 사립대의 교수였지만 자기애성 인격장애 성향을 가진 지독한 술꾼이고 바람둥이였다. 그랬으니 어머니와는 일찍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각기 방을 따로 썼고 거의 대화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꿋꿋하게 맞서 자식들을 지켰지만, 그러나 그 시절 집을 과감하게 뛰쳐나가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여자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할 무렵 자신은 타고난 목소리와 재능에 비추어 프리마돈나로서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약해서 독창을 소화하지 못했으므로 교회 합창단원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성악 훈련이란 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왕 조용필처럼 피나는 노력으로 득음의 경지에 오를 만큼 강렬한 의지와 욕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힘든 일은 딱 질색이었다.
그 당시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꿈이 아쉬워 크게 상심하였고, 심한 좌절감에 빠져 한동안 방황하였다. 그녀는 대리만족을 위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테너가수가 완전히 변심할 때까지 그를 줄기차게 따라 다니기도 하였다. 그와의 심각한 관계는 일 년을 넘게 지속되었지만 결국 파국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그때 사랑과 정념, 절정과 싫증, 배신과 절망 같은 사랑의 파멸에 따르는 수순들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그것은 젊은 날의 통과의례에 불과하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좋은 혼처 났을 때 결혼이라도 빨리 하라는 엄마의 성화를 못들은 체 하면서 몇 년간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냈다. 그러나 여고 시절부터 벌써 남자들이라면 자신만만하였으니 끊임없이 이 남자 저 남자, 잘난 남자들을 찾아서 만나고 곧 헤어졌다. 대개 짧은 만남이었으니 그녀 쪽에서 냉철히 판단하고 끊어버렸던 것이다.
그런 후 아버지 쪽 친척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중학교의 음악 교사로 반강제적으로 취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그녀는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단조로운 학교생활을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있었고, 어느덧 그 생활에 안주하면서 첫사랑의 상처 같은 것은 까마득한 옛일처럼 잊어버릴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별것도 아닌 하찮은 일로 울고불고 질질 짠 자신이 한심했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심현숙은 한층 성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제는 좋은 남자를 만나기 위하여 맞선을 보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잘생기고, 일류 대학을 나오고, 괜찮은 직장을 가진 좋은 조건의 남자를 고르기 위하여 무던히도 많은 남자를 만났던 것이다. 그녀는 유쾌한 남자 사냥꾼처럼 자주 짧게 남자들을 만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 쪽에서 먼저 깔끔하게 정리를 하였다. 그녀는 그때마다 빈틈없이, 필사적으로 계산하고 요모조모를 따졌다.

3. 김규현은 30대 중반쯤에 뒤늦게 중매 결혼한 지 5년쯤 지나서야 아내가 어렵사리 임신을 하였다. 임신 후 아내는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일, 고된 학교일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 했다. 그래서 그가 이참에 아예 학교를 그만둘 것을 그렇게 사정하였지만, 아내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내가 이렇게 통사정할게. 지금 당장 말이지…… 제발 학교 그만둬. 그만두면 될 거 아냐. 우리가 얼마나 기다리던 임신이야. 당신과 태어날 자식을 위해서 말이야.
나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고…… 월급도 많이 받고 있어. 먹고 살기에는 충분하다고. 나중에 건축사 사무실을 낼 수도 있지 않겠어……”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긴박하였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무겁고 짧은 침묵이 집안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외치다시피 하였다.
“뭐가 충분하다고? 그럴 수 없어요. 난 가르쳐야 해요. 학교 일이 점점 재미있어요. 나는 담임을 맡고 있는 우리 반 50명 아이들의 이름을 전부 외울 수 있지요. 지금 모든 아이들과 너무 너무 잘 지내고 있단 말이에요.”
“……”
“어떤 경우에도 내가 학교를 떠나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내 일에 참견 말아주세요. 쓸데없는 짓이에요. 그만해요.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기나 해? 뭘 잘했다고 큰소리치는 거야. 모두 당신 때문이야. 나도 지쳤거든. 이제는 끝내고 싶지. 당신과 사는 게 지긋지긋하지.”

4. 그들은 저녁 무렵 청담동의 멋있는 이태리 식당에서 근사한 식사와 함께 포도주를 세 병이나 마시게 되었다. 분위기가 아주 그럴듯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 선생은 결코 의례적인 말로 서곡을 시작하거나 기교적인 은유를 사용해서 시적인 완곡어법으로 작업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산부인과 의사들이 쓰는 의학적 전문용어와 아주 음란한 단어들을 교묘하게 섞어서 말하여 그녀를 즐겁게 하고 들뜨게 해서 성적으로 자극하였다. 그리고 은근슬쩍 스치듯이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손을 만지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여자가 짧은 순간 얼굴을 붉혔다.
여자는 그때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선홍색 입술, 복숭앗빛 뺨, 희다 못해 투명한 목덜미, 여신 같은 자태.
식사대를 지불하는 과정에서도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가 한사코 자기가 내겠다고 우긴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초대한 자리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하였지만, 그는 이런 자리에서는 남자가 계산하는 법이라고 우기면서 기어코 자신의 카드로 계산하였다.
그들은 모두 상당히 취하였고, 기분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2차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은 그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카페에서, 마치 오래된 연인들처럼 귓불이 닿을 만큼 머리를 가까이 맞대고 다정하게 마주 앉아, 웃고 떠들면서 즐겁게 술을 마셨다.
관능적인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도시의 윤곽선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제 술집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자리를 뜬 것이다. 그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아름다운, 술기운으로 얼굴이 발그레해진 그녀가 온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가 키스를 하였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참으로 멋있고 유쾌한 밤이었다.
그들은 또다시 실랑이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향락의 제단 위에 봉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심전심으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근처 모텔로 가서는 밤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참으로 격렬한 밤이었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말은 필요 없었다. 정말 필요 없었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나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서로의 육체에 접근하는 일은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서 하나하나 밟아 나가야 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은 성급하게 그 과정을 생략해버린 것이다. 그는 피아노 연주자와 같은 섬세한 손길과 관능적인 입술로 번갈아가며 그녀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김영준은 첫날부터 키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하면 서로의 입술을 달콤하게 빨아주는지, 상대방의 혀를 어떻게 음미하며 빨아주는지, 상대방의 침을 어떻게 빨아 먹는지, 어떻게 하면 남자가 여자의 혀를 잘 핥고 빨게 만드는지, 상대방의 입천장을 간질이는 방법 같은 거 말이다. 키스는 침묵의 대화이다. 서로를 해체시킨다. 상대방의 내밀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는 관문이다.
밤의 열기 속에서 굴곡진 육체의 모든 곡선을 쓰다듬을 때마다 엄청난 욕망이 분출하였다. 그는 노련하게 여체의 리듬과 템포에 맞춰 강하게 또는 부드럽게 압박을 가하였다. 그녀의 우윳빛 살결이 꿈틀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고 심장이 격렬하게 펄떡이며 척추뼈는 뿌드득 소리를 냈다.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녀가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목구멍으로 원초적인 쾌감과 신음 소리를 계속 토해냈다. 강력한 이물질이 그녀의 몸속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는 온몸을 휘감고 도는 강렬한 충만감 때문에 그녀는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몇 번이고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였다. 그들의 사타구니에서부터 야비한 욕정이 끓어오르면서 입술과 입술, 육체와 육체가 몇 번이나 맹렬하게 부딪쳤다.
마치 서로를 물어뜯어 삼키려는 두 마리의 성난 맹수처럼…….
심현숙은 포만감을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맨살과 맨살이 닿으면서 느끼는 온기와 부드러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었고, 이 순간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 의사는 그녀의 등을 계속하여 쓰다듬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과 좁은 어깨, 매끄럽게 이어진 등뼈를 어루만지면서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깨물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부드러운 살점을 뜯어서 꼭꼭 씹어 삼키고 싶었다. 그녀의 넓적다리가 여전히 떨리고 얼얼하면서 땀이 났다. 그녀는 잠시 동안 공중에 떠있는 느낌, 아니면 모든 것이 멈춰버린 느낌을 받았다. 그의 존재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고, 감정적으로는 그와 자신이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밤의 열기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날 밤 이후 그녀는 침대에서 김영준에게 모든 걸 맡겼다.
그녀는 지금 완벽하게 굴복했다. 그는 이제 그녀의 긴 속눈썹이 단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내뿜는 노골적인 눈빛,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손이 가볍게 그의 몸을 꼬집으면서 전하는 은밀한 메시지, 밤의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침묵으로 내던지는 고함소릴 완벽하게 이해하였다. 그는 그녀의 벌거벗은 육체의 숨겨진 모든 부분을, 그녀의 무한한 욕망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주 만날수록 서로의 육체에 익숙해지고, 온몸의 신경을 짜릿하게 하는 에로틱한 상상에 빠지면서 무한정 섹스에 탐닉하였다. 그러니 만나기만 하면 몇 번씩이나 섹스를 하게 되고 그때마다 노골적인 포르노에서 나오는 그 대담한 행위와 체위를 흉내 내서 바꿔가며 즐겼다. 그래도 그들은 늘 성적 쾌감에 허기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 순간마다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전화통화를 시도하였다. 그즈음 그녀는 자나 깨나 그 의사만을 생각했다. 그의 더없이 싱싱한 얼굴을, 강력한 육체와 전율을 느끼게 하는 손놀림을 상상했고, 그와 자신은 끈끈하게 묶여 있고, 항상 그와 함께 존재한다는 행복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심현숙은 너무 들떠있어서 그래서 그에게 끊임없이 달콤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나는 당신에게서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내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싶다, 잠시의 중단도 없이.」
「당신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우린 빨리 만나야 돼. 조금도 지체 없이.」
「나와 함께 춤을 추라, 내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춤을 추라.」
「내가 마음껏 울도록, 다만 나를 내버려 둬요.」 등과 같이 대개는 어느 그렇고 그런 썰렁한 시집에서 따온 것 같은 지독히 상투적인 것이었다.
여자의 이런 유치하고 달짝지근한 언어적 유희를 즐겁게 소화하려면 남자는 심장이 튼튼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예민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지금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점점 굳히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사랑 때문에 의혹에 빠지거나 끔찍한 불안감을 경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그 사람에 대한 온갖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녀 혼자 있을 때에는 그의 강렬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짜릿한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혔다.
김영준, 의사 선생님, 정말 고마워, 너무 고마워.
그 누구도 당신처럼 날 사랑해준 적은 없었던 거야. 당신 덕분에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살아있다는 실감이 드는지! 당신만 생각하면 짜릿하고, 열이 나지, 온몸이 막 떨리고.
난 지금부터 당신을 끝까지 믿을 거야, 끝까지 사랑한단 말이지, 죽을 때까지 말이야. 몸은 정직한 거야, 그까짓 감정이나 이성은 날 속일 수 있어도 내 몸만은 날 속일 수 없어. 내 몸은 당신을 느끼고 있어. 사랑은 육체적인 거지. 정신적 사랑, 그건 예수님이나 하는 웃기는 소리이지.
그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였을 때의 손바닥에서 땀이 나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발음이 또렷하지 않는 이상한 증상은 이미 사라졌다. 그의 남성적 육체와 체취에 벌써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얼이 빠져 있어서 그 무렵 거의 매일 밤 만난 것 같다. 그리고 매일 황홀한 밤을 보냈다. 어떤 때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저녁도 거른 채 모텔로 직행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제 서로 터놓고 지내게 되었다.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것은 없기야.”라고 말하며, 즐겁게 웃었다. 알고 보니, 그는 그녀와 동갑이었다. 그래서 이상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의 아내는 젊은 나이에 갑상선암 중에서 희귀한 미분화암에 걸려 있어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것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대학병원의 담당 의사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준은 크게 상심하기는커녕 그저 애매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그는 냉철하게 이것저것을 따졌다. 마누라가 죽으면 필리핀에 가서,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작은 병원을 차려 잠깐씩만 일하고, 아주 편하게 살기로 작정하였다.
마침, 마닐라 남쪽 외곽 고급 주택가에는 마누라 부친이 마련해 준 마누라 명의의 단독주택이 있었다. 그는 마누라가 죽으면 이를 상속받아, 그곳에서 시간 나는 대로 골프 치고, 여행이나 하면서 한가롭게 살 작정이었다. 동남아 쪽 여자들을 만나는 것도 뭐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란 그렇지 뭐.
계산에 밝고, 자기중심적인 그녀는 새삼스럽게 다시 골프 연습을 하기 시작하였다. 너무 열심이어서, 그는 놀랐다. 그들은 그가 멤버십을 갖고 있는 경기도 쪽 골프장에 가서 함께 자주 골프를 치게 되었다. 골프를 친 후에도 피곤한 줄 모르고 어김없이 모텔로 갔다.
그들은 그 당시 이 유쾌한 불륜행각에 대하여 어떤 혼란이나 심적 고통을 맛보지 않아도 될 만큼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 무슨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사태가 너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정념의 불꽃이 완전히 점화되어 버렸다. 활활 타오르는 화려한 불길이 그녀를 꼼짝 못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즈음 그녀의 영혼 속에서는 관능의 불길이 끊임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끔 두려움을 느꼈다. 그에게 너무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가 상실되어 버리지 않을까, 지워져버리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고 매달리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때 그들의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랫동안, 남편과 그녀의 깊은 내면에는 가시 돋친 감정 대립이 불타고 있었다. 그 불씨는 어떤 경우에도 꺼지지 않고 항상 잠복하고 있었다. 그녀를 갉아먹고 있던 그 성가신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족쇄를 벗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해방되었다. 자유롭다고 느꼈다. 한껏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신은 지금부터 그 자유를 무한정 즐기리라.
그녀는 오래 전에 잊었던 생동감 또는 충동감을 만끽하였고, 동시에 달착지근한 승리감도 맛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분노와 고통, 경멸이 말끔히 사라지면서 본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그녀의 생기를 잃어가던 얼굴이 다시 아름답게 피기 시작하였다.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땐 모든 것이 팽창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당시 그 어느 때보다도 발걸음은 가볍고 목소리는 경쾌하였으며, 자주 많이 웃고 크게 노래를 불렀다.

심현숙은 남편에게 반발하기 위하여, 또는 복수하기 위하여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긴 것일까. 아니면 느끼한 감각 때문이었을까. 이 삼각관계의 운명을 그녀는 어떻게 예견하고 있는가.
기하학에서 삼각형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은 세 개의 점을 이으면 만들어진다. 각기 두 개의 점이 하나의 선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렇게 이어진 세 개의 선이 삼각형의 변을 형성한다. 삼각형에는 정삼각형, 직각삼각형, 두 변과 두 각의 크기가 같은 이등변삼각형이 있고, 이등변삼각형은 다시 예각삼각형, 둔각삼각형이 있다. 그러나 정삼각형은 같은 크기의 세 각과 같은 길이의 세 변을 갖추고 있으므로 조화를 상징하는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 모든 평면도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질투심이 지배하는 비이성적인 남녀관계에서 삼각관계는 둘은 웃고 하나는 울어야 하는, 또는 하나는 웃고 둘은 울어야 하는, 아니면 셋 모두 울어야 하는 자기 파괴적이고 위험한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셋 모두가 정상적으로 인간다운 남자이고 여자이어서 진짜 미치지 않았다면 그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비이성적인 인간사회의 현실에서 결코 동등한 삼각관계, 즉 정삼각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5.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심현숙은 엄청난 제안을 하였다. 그때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전혀 임신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반드시 피임조치를 하였어요. 잠깐 실수한 거예요. 떼 내 주세요, 아이는 필요 없어요.”
그녀는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대하여 변명을 겸하여 자기 합리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술꾼의 자식을 낳을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 자식 역시 대단한 술꾼일 게 틀림없어요. 술꾼은 정말 지겨워요.”
의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그의 눈가에 잔뜩 심술궂은 웃음이 노골적으로 번졌다.
“잘 몰랐네. 그렇게 형편없는 술주정뱅이인줄은!?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만 들어오면 막 발길질하고…… 때리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겠네!? 술병을 마룻바닥에 내팽개쳐서 박살이 났을 거야. 유리 파편이 마구 튀었겠지.
당신…… 당신은 그걸 치우면서 훌쩍거렸겠지. 얼마나 지겨웠을까? 지옥이 따로 없었겠지.”
그러자 그 여자는 정색을 하고 정정하였다.
“그 사람은 매일 밤 비틀거리며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는 술주정뱅이는 절대 아녜요. 2차 이상은 잘 안 가거든요. 술에 취하면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게 그의 오랜 버릇이에요.
가끔 화장실에서 밤새 심하게 토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욕지거리를 하는 일은 없어요. 아주 점잖거든요…….
하여튼…… 세상 고민은 혼자서 다하는 사람이에요. 그는 만날 술은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는 위대한 살인자라고 욕하면서도 끝끝내 끊지를 못했어요.”
그는 술만 취하면 그때부터 자기연민에 빠진 나머지 자학적이 되어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술을 마실수록 내성이 생겨서인지 웬만큼 마셔서는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얼큰히 취하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술을 마셔야만 하였다. 그는 항상 아슬아슬한 순간 도망치듯 술집을 빠져 나갔다.
신혼 초기에 그녀가 날카롭게 지적하였었다.
“술이 결국 당신을 망쳐서 당신은 제명대로 못 살 거예요. 당신 스스로 그걸 잘 알고 있을 거구요.
그래도 술을 마실 겁니까? 지금 당장 술을 끊으세요. 필요하다면 적절한 치료도 받으시라구요.”
그는 매번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난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더욱이 알코올 중독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 난, 취하지 않지. 취하는 게 싫거든. 나의 몸속에서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왕성하게 작용하거든. 술꾼들이 그따위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중얼거리고…… 소릴 질러대는 것은 정말이지 질색이거든. 아무리 취해도 자신을 언제든지 컨트롤하고 있지.
내가 조금씩 술을 마시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부인하지 않거든. 그렇지만 그건 단지 업무상 긴장을 풀기 위해서야. 아주 가끔씩 조금 지나치게 마시지만, 그땐 회사 사람들하고 함께 마시지. 절대로 혼자서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구.
지금 내 위장은 알코올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 요즈음은 술을 많이 마셔도 거의 토하지 않고 있거든. 너무 걱정하지 마. 당신 마음은 이해하지. 그럴 거야.”
그렇지만 그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술에 탐닉하기 시작하였는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벌써 우울한 기분이 되면 혼자 몰래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지만, 아마 회사에 입사하여 설계 부서에 배치되고 나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복잡한 작업과정에서 술은 지치고, 과민해진 신경을 달래주는 이완제 역할을 하였을 것이고, 그의 상상력이 고갈되어 갈 때 그의 영감을 자극하기 위하여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증세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음주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음주는 더 이상 의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그의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고, 몸에 배어버린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 의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남편일이라고 열심히 편을 드는군.”
“혹시, 의사의 양심 때문에 꺼려하는 거야? 하지만, 당신이 해주지 않으면 다른 데 가서 할 거예요. 제 결심은 확고하니까요.
산부인과는 널려 있어요. 그러나 당신께 부탁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것보다는 익숙한 당신이 낫겠죠.”
“전혀…… 상관없으니까. 얼마든지 오케이야. 난 산부인과 전공이거든. 염려 놓으시라구요.”

그 며칠 후, 그는 임신중절 수술을 하기 위하여 그녀를 자기 병원의 수술대 위에 눕혔다. 그때 그녀는 몹시 초조하여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피로와 두려움이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진담인지, 농담인지를 하였다.
“자기 그것은 아무리 봐도 잘생겼는걸. 냄새는 말이야, 축축한 이끼 냄새가 나지. 그러니까 맛이 좋지, 쫄깃쫄깃하단 말이야. 왜, 우리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 않았어……”
그는 부드럽게 검은 털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그녀의 둔덕을 몇 번씩이나 쓰다듬었다. 그녀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몸을 꿈틀거렸다. 그녀는 이제 공포심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긁어내는 데는 약간 늦은 감이 있지만…… 걱정 말라고. 금방 끝날 거야. 내 솜씨를 믿어야 해. 나는 이 수술을 수백 번도 더 해봤으니까. 앞으로도 수천 번, 수만 번은 더하게 되겠지.”
그러면서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궁 내 모든 조직을 제거하기 위해 그녀의 자궁벽을 샅샅이 긁어냈다. 그 작업은 너무나 간단하고 손쉬운 일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고귀한 한 생명이 말살되었다는 죄의식 같은 것은 눈곱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적극 원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지구상에 인구가 넘쳐나므로 그 수술은 인구 조절에 유용할 것이었다. 자신이 먼저 하지 않으면 다른 산부인과 의사가 수술할 것이고 그 수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는 오로지 많은 돈을 벌어야 하였다.
늦은 가을 한가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작은 창문을 통하여 병실로 들어와 복잡한 심정으로 수술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을 잠깐 비추고 사라졌다. 산부인과 병원의 잔인한 악취가 그녀의 코끝을 찔렀다. 이제 그녀의 몸속에서 남편이 남긴 흔적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우리가 얼마나 기다리던 임신이야.”라고 절실하게 말하던 남편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살인행위는 아니야. 절대로……. 그 무시무시한 단어가 싫어. 소름이 끼치니까. 이건 단순한 거야. 흔해빠진 유산의 일종에 불과한 거야.
내가 오해한 걸까? 그 여자 말이야? 배신감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모든 게 당신 탓이지. 당신이 문제인 거야. 당신은 사막에 미쳐버린 사람이니까, 사막에서 살다가 끝내 사막에서 죽을 운명이지. 난 사막 같은 것은 딱 질색이야. 문명사회에서 살아야만 돼. 화려한 도시에서 살아야 된단 말이야.
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아마 마지막으로 선물을 준거야. 틀림없이 난 그와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그러니까 그를 놓치면 절대 안 되지. 그는 잘 생기고 능력 있지. 나와는 모든 게 잘 맞아, 너무 잘 맞지……. 모든 자세가 잘 맞는 거야. 앞으로 해도, 뒤로 해도, 아무렇게 해도 잘 되는 거야. 항상 기진맥진해서 끝장을 보지. 만족스러워, 만족스러운 거야.
성불능자에 가까운 그 애송이 테너, 너무 고지식한 당신, 그리고 다른 어설픈 자들과 완전히 다른 거야. 그는 확실하게 챔피언이야. 나는 이미 당신을 버렸어. 그 족쇄를 스스로 벗겨냈지. 난 지금 자유란 말이야.
그 여자는 곧 죽을 거야. 하루 빨리 죽어야만 하지.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은 쓸데없는 짓이지. 내가 써야할 돈을 병원비로 까먹고 있으니까. 그 여자가 빨리 죽게 무슨 푸닥거리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어쨌거나 우리도 이혼해야 할 거야. 나는 법적으로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아무튼 당신에게 미안하긴 해. 그러나 난들 어쩔 수 없다구. 어쩔 수가……’
수술이 끝난 후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 의사는 세면대에서 두 손에 잔뜩 비누칠을 하여 피부가 벗겨질 만큼 박박 문지르며 씻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이건 유산이에요, 알았죠. 비밀을 철저히 지켜주세요. 무덤까지 싸 가지고 갈 비밀이에요.”

6. 그 당시 심현숙은 학교 업무 때문인지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기 시작하였고, 무슨 일이건 짜증내는 일이 많아졌다.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학교 일로 무리를 거듭해서인지, 결국 임신 4개월여 만에 그만 유산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유산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아내가 과로해서 유산한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도저히 다른 상상을 할 수는 없었다.
1997년 11월 말경이었다.
김규현은 유산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충격으로 그는 망연자실하였다. 갑자기 밀려드는 검은 어둠이 그를 덮쳤다. 곧 가슴 속에 차갑게 응어리져 있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그의 단정한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싸늘한 입술에 새겨진 그 분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 결혼을 인생의 최대 실수로 간주하고 저주하였다. 그러나 아내가 임신하고 출산을 하여 귀여운 아기가 태어났다면 서로 간의 어떤 불일치나 불화는 얼마든지 해소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있었다면…… 쌔근쌔근 잠든 그 아이의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볼 수 있었다면…… 해소될 수 있었을 거야. 한때는 당신을 넋을 잃고 쳐다보느라 눈이 멀 정도였던 시절도 있었고…… 밤마다 침대에서 코를 비비고 입술로 깨물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나의 가슴팍에 얹었던 손의 가벼운 무게를 기억할 수 있고, 뽀얀 살 속 보이지 않는 혈관의 불규칙한 맥박을 지금도 느낄 수 있지. 그 시절에는 당신은 꿈에서 깨어나면서 나를 더듬으며 말했었지. 꼭 안아줘요. 내가 나쁜 꿈을 꾸었나 봐요.’
그는 아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과로로 유산을 하였단 사실 말이다. 그 후, 두 사람 사이는 급속도로 냉랭해지고, 사사건건 충돌하고, 자주 심각하게 말싸움을 하였다. 부부싸움과 눈물, 맞고함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싸우고 또 싸웠다. 고통, 눈물, 충격, 분노의 감정들이 뒤엉켰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모멸감 때문에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소프라노 목소리로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때로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심한 분노 때문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끔찍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무렵, 김규현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고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천천히 숨을 내쉴 수 없었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그 멋있고 신비한 술, 소폭을 많이도 마셨다. 인생이 허무하고,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집요한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매일 혼자서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 그는 갈증을 면하기 위하여 매일 술을 들이켰고, 갈증이 없어도 갈증을 예방하기 위하여 또 술을 마셨다. 술은 충실하게 마취제 역할을 하였으므로 그 신비한 액체는 아주 잠시이긴 하지만 효과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아무 술이나 닥치는 대로마시고 또 마시고, 토하고 또 토하기 일쑤였다. 그런 다음 식사를 끊었다.
그는 평생 동안 술을 좋아했지만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었고 그 때문에 폐인이 되었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는데 마침내 중독자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술을 끊어야 하거나 줄여야했지만 그러면 금단 증상이 왔다.
그 무렵 그 심각한 증세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자 이를 견뎌내기 위하여 더욱 술에 의존하면서 매일 술을 마시게 되었고, 술만 마시면 만취한 상태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는 그만 마셔야 하는 줄 알면서도 매번 끝까지 갔다. 그리고 몸을 겨우 추스를 정도로 취하여 방배동 뒷골목 연립주택으로 가는 긴 골목길을 비틀비틀 걸으면서, 때로는 집에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느릿느릿 갈지자로 걸으면서, 터져 나오는 괴성 같은 울음을 참아내기 위하여 늘 낮은 목소리로 낡은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렸다.
그는 그 기교적이고 여운이 남는 가사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 우울한 선율이 그를 가슴 저리게 하였다. 그때 초겨울이 되어 희미한 가로등이 졸음에 겨워 하품을 해대는 골목길에 불어 닥치던 시린 바람이 그의 가엾은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늦은 밤, 그는 취기로 흐려진 눈에 악의를 가득 담아서 아내의 방을 쏘아 보았다. 그 방에서 매번 가볍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문틈으로 새나오는 그녀의 불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면 그녀가 짐짓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었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같은 맹추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한강에는 얼음이 꽁꽁 얼고 얼음 조각들이 강의 중심부에서 동동 떠내려갔다. 차가운 바람 끝이 얼마나 매섭든지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사람들은 추위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해는 유난히 눈도 많이 내려서 도시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였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이 될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는 몹시 암담하였다.
그때 회사는 미증유의 경제위기인 IMF 사태를 그럭저럭 잘 극복하고 있었다. 그는 회사의 3월 정례인사 때 대표이사와 면담한 후 리비아 대수로 공사의 현장 근무를 자원하였다. 견딜 수 없이 답답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때는 아내와의 사이에 어느 정도 냉각기가 필요하였다.

7. 그녀의 남편이 리비아의 공사현장으로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산부인과 의사의 부인도 죽었으므로 그들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사실 솔직해야 하리라. 심현숙은 내심 그녀가 빨리 죽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하였던가. 그녀가 죽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마나 희희낙락하였던가.
그 역시 아내의 죽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별반 슬퍼하지도 않았다. 아내가 건강했던 시절에도 그와 아내와의 사이는 그저 데면데면했으니까. 다른 바람둥이 남편과 그의 현모양처형 아내 사이처럼 말이다.
그의 아내는 용도조차 알 길이 없는 각양각색의 약들을 먹으며 그 지독한 항암치료를 받았고 지독한 통증 때문에 자주 진통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녀는 새까만 설사를 지렸고 플라스틱 통에 검은 토사물을 쏟아냈다. 그때마다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이제 아내의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았다. 한동안 욕창 때문에 고생했다. 탄탄했던 엉덩이 살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살가죽이 골반뼈를 간신히 덮고 있다. 아내는 죽음의 사신을 향해 진즉 투항했고 더 이상 얼굴에 고통의 표정은 없었다.
그러나 남편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바람둥이 자식……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네 놈이…… 치사한 자식 같으니라고…….’
의사 김영준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처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남들에게 (특히 결혼할 당시 키를 몇 개씩이나 건네준 처가 쪽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몸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기까지 했다.
그가 난폭하게 전기 충격기를 누르자 강력한 전류가 그녀의 몸에 흐르면서 모니터 스크린의 푸른색 파동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김영준은 땀을 뻘뻘 흐리며 그녀의 가슴을 계속적으로 짓눌렀다. 그러나 그게 무슨 허튼 짓거리인가.
그래도 아내는 담당 의사가 예상했던 6개월보다는 3개월여를 더 살다가 죽었다.
심현숙은 그 무렵부터 그의 압구정동 큰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다시피 하였다. 그녀는 그의 욕실에서 화려한 비누 거품으로 목욕을 했고, 부엌에서는 그녀가 자신 있게 요리할 수 있는 카레 요리를 만들었으며, 그의 신용카드를 함부로 사용하였다.
김영준은 아내가 죽자 내심 홀가분했다. 몇 개월쯤 지나서 벌써부터 병원 문을 닫고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이민을 준비하였다. 그녀 역시 학교를 그만두고, 남편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별다른 의식 없이 그 젊은 의사에게 순식간에 빠져들면서 그냥 즐기기 위하여 출발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와 김영준 사이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미리 아주 세심하게 계산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가을 산에 산불이 번지는 것처럼 급속한 사태의 진전에 따라 여자의 맹목적 욕망이 분별없이 초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아내가 악성 암에 걸려서 오늘내일하는 상황에서 그와 깊숙이 사랑에 빠지자 이제 무한정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남편은 해외로 떠나고 남자의 아내는 저세상으로 떠나는 일련의 과정에서, 더욱 확실한 관계를 추구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다. 그녀는 벌써 그의 아내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그 무렵부터 남편과 이혼하고 그 의사와 확실한 관계를 맺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몹시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일방적인 생각에 불과한 것이고, 남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녀보다 더 젊고, 더 예쁘고, 더 돈 많은 여자를 물색 중에 있었다.
그 당시 일의 진척은 의외로 지지부진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답답할 정도로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그는 예전처럼, 우린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공동운명체라는 달콤한 말을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그는 팽팽하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라고 깨닫고 있었다. 불꽃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사랑하는 상대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날 지경이었다. 서로의 매력에 끊임없이 흠뻑 빠져 있어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일을 할 때에도 온통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서로 완전히 몰두해 있어서 그것은 짜릿한 전율로 다가왔다. 그를 생각하면 생각할 때마다 그녀의 내장과 항문, 자궁 속에서 무언가, 욕망이 무섭게 타오르다 흐물흐물 녹아서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스러운 생명,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것이다.
심현숙은 생각하였다. ‘그의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것도 하루 빨리, 딱 한 번은 임신해야 할 거야, 그래야만 그를 꼼짝없이 옭아맬 수 있으리라.’
그녀는 그를 차지해야 한다는 허망한 욕망에 휩쓸리면서 더욱 지칠 줄 모르고 그것에 탐닉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실제의 욕망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과도한 것이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너무나 강렬했던 최초의 불꽃은 서서히 사그라지는 법이다. 그러한 흥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곧 심드렁해지기 마련이고, 그러면서 허망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호적을 같이하는 부부 간에도 사랑은 가변적이어서 쉽게 변색되고, 변주되고, 왜곡되는 법인데, 하물며 불륜의 관계에서는 육체적의 쾌락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그 강도가 급속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이 너무 깊숙이 진창에 빠져든 것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의 경우처럼 아주 적절한 시기에 발을 뺐어야 옳았다. 그는 항상 만나는 여자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싫증이 나면 곧바로 돌아서 버렸다. 여자가 입게 될 마음의 상처 따위는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번 헤어진 사람과는 다시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여자와 헤어지면서 가슴이 찢어질 듯한 상실감 같은 걸 느끼는 일은 없었다. ‘이건 단순한 불장난에 불과한 거야. 여자 쪽에서도 눈치껏 알아차려야 할 거야, 그걸 모르면 둔감하거나 머리가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의 경우에는 아내가 암에 걸리고, 그리고 죽는 과정에서 그 뒷수습을 하면서 몹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 시기를 놓친 것뿐이다. 진작 과감하게 잘랐어야 하였다. 이제는 마지막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고, 그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러자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일시 유예 상태에 있었던 그녀에 대한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심각한 것까지 온갖 종류의 미움과 역겨움, 권태와 불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그녀가 더욱 보기 싫어졌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젠 지겹군, 지겨워. 그 여자한테 신용카드를 맡긴 게 큰 실수였던 거야. 제멋대로 명품 백을 몇 개씩이나 사고…… 열흘이 멀다하고 청담동에서 비싼 옷을 사 입으니 감당할 수 있느냐 말이야. 정리해야만 하지. 이번에는 시간이 좀 걸렸어. 여자란 싫증이 나면 그걸로 끝인 거야. 사태가 잘못 돌아가면 그저 도망쳐야…… 삼십육계가 최고인데……. 나는 언제나 날쌨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이 지경까지. 실기해서는 안 되는데……. 긴 말은 필요 없는 거야. 그래봐야, 구차하게 될 테니까. 딱 몇 마디만…….’
여자는 이제 수줍어하지 않았다. 그 수줍은 미소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점점 살찐 얼굴이 퉁퉁 부은 것 같고. 몸에서는 시큼한 땀 냄새가 나고. 밤이면 가끔 약간이긴 했지만 코를 골고.
미적미적 대던 김영준은 어느 날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짤막하게 말하였다. “글쎄, 지금 떠나기는 적당하지 않아. 상황이 여의치 않단 말이지. 재산 정리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더라고.”
그는 요즈음 그녀 만나기를 극력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만난 경우에도 그들의 대화는 겉돌기 시작했다. 애정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말은 그저 건성이어서 머릿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때때로 까닭 없이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일이 점점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자의 변덕에 비위를 맞추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바람처럼, 하늘의 뜬 구름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가끔 너무 세게 깨물었기 때문에 그녀의 젖꼭지에서 느껴졌던 상큼한 통증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그 무렵 그녀는 계속 너무 긴장을 해서 온 몸에 난 모든 털들이 곤두서 있었고 배 속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당신, 언젠가는 날 떠날 거야.”라고 우울하게 말하면, “아니,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네가 날 떠날 리도 없을 테지.”라고 그가 단정적으로 말했었다.
그녀는 스스로 다짐하였다. 널 놓아줄 수는 없어. 순순히 놓아줄 수는 없지. 어떻게 잡은 마지막 기회인데……. 넌 나에게 이미 코가 꿰여버린 거지. 그녀는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파트 문은 늘 굳게 잠겨 있었고, 그는 예고도 없이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곤 하였다. 핸드폰 번호도 바뀌었고, 메시지가 끊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의지, 마지막 인내심이 급속히 붕괴되었다. 그것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맞이한 이별 같지도 않은 이별이었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우린 끝난 거지. 미련 없이 끝났어!”
“당신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 당신을 이해할 수 없거든.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마음대로 농락해놓고…… 이제는 아예 죽이겠다는 거지.
그러면 안 되지. 천벌을 받을 거야. 다시 생각해봐. 돌아와 줘. 내가 이렇게 사정할게.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
“멍청하긴……. 혼자서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걸 몰라서 그래? 어리석게 굴지 말라구.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그의 치켜뜬 두 눈은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분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개자식 같으니라고…… 사기꾼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가로수길 거리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은행나무 가지와 잎에 닿아서 서걱거린 후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한 폭의 정물화처럼 완벽해 보였던 미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그 사랑이란 존재가 지금은 가장 큰 고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 남자와 한 모든 약속과 맹세는 지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녀는 그를 증오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녀는 기억나는 온갖 독설을 동원하여 그를 저주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녀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한 감정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이 턱턱 막히고,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에 통증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녀는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여전히 두통이나 어지럼증이 나타나고 밤에는 심한 불면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어떤 때는 두려운 감정이 폭발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였고, 극히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기도 하였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화병과 우울증이 겹친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심하게 질책하였다. 그러나 몇 달 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증세는 급속히 완화되기 시작했고, 분노마저 금세 멀리 사라졌고, 그리고 그녀는 그까짓 거 단념하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그런데도,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 남자에게 수십 번씩이나 허벅다리를 벌리고 그를 받아들인 자신이 역겹게 여겨졌다. 정말 구역질나는 일이었으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의 자존심은 짓이겨질 대로 짓이겨졌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그러니까 수술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가 말했다.
“이제 몸도 가벼워졌으니 스리섬 해보는 게? 어때?”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게 뭔데?”
“순진한 척하지마. 그게 어때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야. 남자 한 사람과 여자 두 사람 또는 여자 한 사람과 남자 두 사람이 하는 거 말이야. 그게 지금 은근히 퍼지고 있거든. 스리섬하며 함께 히로뽕을 하면 금상첨화일 거야. 하늘을 훨훨 나는 기분 아니겠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이라면…… 그까짓 것…… 뭐…… 못할 것도 없지만.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녀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리석게도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은 것은, 그리고 지금 마음고생을 해봤자 그건 정말 바보짓이었다. 그에게 고함을 질러주고 싶었다. 다시는 그 자식을 보지 않아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언제가 우연히라도 그 뻔뻔한 자식을 만나게 되면 거침없이 그 자식의 못된 얼굴에 침을 뱉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딴 자식한테 당하다니……. 그런 성도착자이고 변태한테 말이지. 그때 그 자식의 정체를 알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 그 역겨운 자식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그는 사막의 전갈처럼, 독사처럼 사악하고 위험한 존재라도 되는 걸까.
아니야, 아니야, 그를 무시해야만 하지. 끝났지, 끝났어. 당신하곤 끝났어. 당신의 냄새가 역겹지. 그때 카페에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어야 하는데. 그때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녀가 불쾌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았기 때문에 차마 못한 거지.
김영준. 악몽. 실패. 수모. 더 이상 나 혼자서 이런 고통을 당할 수는 없는 거야. 영원히 끝장을 내버려야만 되지. 이 모든 것에 내가, 바로 내가 마침표를 찍는 거야.’

8. 김규현 상무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현장에서 2년째 영국 건축 기술자들과 함께 공사 감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해 20일 간의 짧은 여름휴가 동안 사하라 사막의 남쪽을 여행하기 위해 트리폴리에서 부정기선 전세기에 편승하여 알제리의 타만라세트로 내려왔다.
그러나 사막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15일째 모래언덕 계곡에 갇혀있다. 생명의 젖줄인 한 방울의 물까지 떨어졌다. 심한 갈증으로 목구멍이 불덩이처럼 타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음을 앞두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사막에 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밤이 다시 찾아왔다. 밤의 한기가 담요를 덮고 있는 삐쩍 마른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 지독한 추위도 이제 마지막이야.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모호하고 아득한 어머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는 존경받는 자이고 멸시받는 자이다. 그녀는 타락한 자이며 거룩한 자이다. 그녀는 아내이고 처녀이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딸이다…… 그녀는 지식이며 무지이다.
그리고,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1998년 늦은 봄. 토요일 석양 무렵. 황혼의 빛깔은 마치 무지개를 층층이 쌓아 놓은 것처럼 불타는 분홍, 장밋빛 분홍, 짙은 회색 분홍으로 변하고 있었다. 세상의 풍경이 황금빛 석양에 물들고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본다. 시뻘건 해가 석양 저편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그는 그때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에서 방배동 쪽으로 아주 느릿느릿 길을 걷고 있었다.(그때는 아프리카로 가는 출국 준비가 거의 끝나서 홀가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6월 초순경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는 그녀와 길에서 갑자기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깜짝 놀란다. 그는 손희승을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그녀가 곧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녀가 새로 창간한 패션 전문 잡지의 사진기자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죄송해요. 얼마 전에 회사를 옮겼지요. 말씀드릴 기회가……. 건축 쪽 현장 사진은 어지간히 찍었거든요.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었지요. 자세한 이야기도 없이…… 그냥 그랬어요.”
두 사람은 짧은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면서…… 잠시 환한 미소에 잠긴다. 서로 반가워서 손을 잡을 듯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주춤거렸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녀에게 심술이 나서 빈정대고 싶었지만 꽉 막혀버린 목구멍에서 말이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가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골목길로 꺾어지는 모퉁이에 너무 빨리 도달했다. 거기서 잠깐 멈추었고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려고 하였지만 눈물이 글썽거려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뒷골목길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렸다.

트리폴리에 파견 나온 회사의 직원과 현지인들로 구성된 구조대에 의해 김규현의 시체는 석양 무렵에 발견되었다. 태양이 서쪽 모래언덕 너머로 사라지면서 아주 잠시 붉은 잔영이 사막에 여린 빛을 드리우다, 곧 어둠이 찾아왔다.
죽은 그의 얼굴이 너무나 평온해 보여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깨어나지 않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육체는 그동안 음식물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였고, 몸속의 모든 수분이 전부 증발하면서 너무 말라, 위장과 등골이 맞붙어 있을 만큼 뼈와 가죽만이 남아 있었다. 뼈밖에 남지 않은 깡마른 몸에 걸친 옷이 너무 헐렁해서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잠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그는 아주 부드러운 모래침대 위에 태평스럽게 누워 있어서, 얼굴에 고통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강인하고 섬세하였던 이목구비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다만 그의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와 신중한 눈빛은 살며시 감긴 눈꺼풀 속에 감춰져 있었다. 그의 눈은 살아생전에는 어둡고 그윽해서 언제나 저 멀리 지평선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대계 이집트인 의사가 동행하였다. 알리마르크는 그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본 후 그가 죽은 지 채 하루가 안 되었다고 말했다. 일 년 전쯤, 트리폴리의 병원에서 처음 보았을 때 약간 수줍어하던 그 눈빛, 조금 슬퍼보이던 매일 물과 우유를 많이 마시라고 충고한 일이 엊그제 같았다.
구조대는 모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트럭 밑 은신처로부터 직선거리로는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야트막한 모래언덕 너머에 진을 치고, 며칠째 모래언덕 사이 침식으로 파인 협곡을 뒤지면서, 그들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 거리는, 그가 단지 ‘여기! 여기! 여기야! 우리가! 우리가 살아있어!’ 하고 외쳤으면, 사막의 건조한 대기 속에서 정적을 깨고 바람에 실려서 바로 닿을 수 있는 그렇게 짧은 거리였다. 그러나 바람에 휩쓸린 모래 먼지가 트럭 주위를 두껍게 뒤덮고 있어서 그들은 쉽사리 트럭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어.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야. 어떤 사람이 한계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처해 있어도 대부분의 경우 그 결과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만큼 별것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 아주 이따금씩 그 결과가 극도로 나쁜 경우가 있을 뿐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알리마르크가 체념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간단하게 사망확인서를 작성하였다.


Certificate of Death
Name: Kuhyun, Kim
Date of Birth: 20. 11. 1955.
Nationality: South of Korea
Final Destination: passing stay for the desert journey at the south
side of the Sahara
Cause of Death: mental derangement by dehydration and self
murder

9. 가을이 하루하루 더 깊어가고 있었다. 가을이 기진맥진한 채 저 멀리 가고 없었다. 단풍으로 물들었던 가을 나무들이 어느새 앙상한 가지만 남겨놓은 채 잎들을 낙엽으로 내려놓았다. 낙엽은 모든 추억을 데리고 사라졌다. 공기는 여전히 깨끗하고 투명하였다. 가을의 단풍들은 떠난 지 오래되었고, 눈은 아직 먼 것 같다.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겨울은 겨울이었다. 마지막 낙엽이 겨울을 몰고 온 것이다. 겨울은 계절의 끝물이다. 햇볕이 여리고 나무들은 헐벗었으며, 겨울바람은 너무 스산하여 다른 계절과는 그 느낌부터가 다르다. 겨울은 황량하고 마음의 병이 더욱 깊어지는 계절인 것이다. 따뜻했던 날들은 지나갔다.
그가 죽은 후 벌써 6개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시간은 깊은 강물처럼 소리 없이 흐른다. 그의 영혼은 지금도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 홀로 누워 있을 것인가? 여기저기 날아다닐까? 그곳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곳일까?
도시는 이제부터 몇 달 동안은 잿빛 겨울 속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겨울은 인간의 신음소리로 가득 찬 괴물이었다. 겨울 하늘로부터 여린 광선이 도시의 지붕 위로 무기력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밤이 되면 거리는 칠흑 같이 어두운 저녁 빛이 감싸고 있어서 갑자기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쓸쓸한 겨울바람이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어둠침침한 새벽 거리를 지나쳐 갔다.
아직 완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새벽의 색조가 스며들어오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새벽의 단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의 유령은 벌써 사라지고 없는데도 말이다. 그 새벽을 달곰씁쓸한 꿈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해의 비정하고 메마른 겨울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도시의 겨울이 이렇게도 쓸쓸하고 적막한 지는 처음 알았다. 황홀한 순간은 덧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짧지만 행복했던 시절의 화려한 광채는 사라져 버리고, 짙은 안개 같은 허무만 남았을 뿐이다. 이제서야 새삼 자신의 허영심을 탓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그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초췌한 얼굴이 더욱 굳어 있었고, 가끔 멈칫거리면서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그해의 우울한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고 몹시 추웠다. 그리고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점점 더 그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처음 데이트하던 날 그녀의 마음을 빼앗은 그 수줍어하던 다정다감한 눈빛이 새삼 생각났다.
그만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일찍이 있었던가, 그만큼 그녀를 순수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문득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패배자였다. 덧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오랜 세월을 허둥댄 철저한 패배자임을 깨달았다.
‘나 같은 하찮은 사람까지 자유를 남용하였으니,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거야. 내가 그를 죽게 한 거나 다름없어. 그는 위대한 건축가가 될 수 있었지. 그의 아름다운 꿈을 함께 죽인 거야······.
그러나 김규현은 어차피 사막에서 죽을 운명이었어. 그는 거길 죽음을 찾아서 갔던 거였어. 그가 사하라의 맨 밑바닥 구석까지 그 엉뚱하고 절망적인 여행을 떠났던 것을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 있겠어.
나는 그 운명을 일찍이 예감하고 있었지. 그는 항상 어디론가 떠나야 했어. 그를 내게 붙잡아 둘 능력이 없었지. 당신 혼자 떠나는 당신만의 여행. 그 때문에 저항한 거지. 지긋지긋했거든. 그러나 당신이 떠날 때마다 절망적이었지.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에 이별을 준비했거든.’
그 무렵,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그녀의 마음을 정화시켰다. 하지만 눈물은 빨리 말랐다. 그녀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모든 일이란 게 역시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그녀의 그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다시 그녀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심현숙은 다시 괜찮은 남자 (잘생기고, 고급 외제차 정도는 타고 다니는, 돈 많고, 힘 있는 남자, 그렇다면 나이는 약간 들어보여도 괜찮지 않을까) 찾기에 열중하였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나이 들어 여자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자신감을 잃어서는 안 되리라. 그녀는 다짐하였다.
그가 거울 속에서 생전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간절히 손짓을 하였다. 그의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바람도 쏘일 겸해서 남쪽 바다 쪽으로, 사하라 사막에 갔다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사막에 가기 위해서 적당한 패키지여행 코스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부심이 강하고 냉정하고 고집이 센 여자. 강력한 자아가 똑똑한 그녀를 지탱한다.
2000년. 서울의 겨울. 그 겨울이 사라져간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반복과 순환.

에필로그
나는 살아생전에 바람둥이 산부인과 의사와 심현숙의 만남과 열렬한 사랑, 배신과 결별의 과정을 까마득히 몰랐다. 그런데 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대담한 심현숙이 그런 꾀죄죄한 얼치기 인간한테 당했다는 게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혹시 뛰는 여자…… 나는 남자……
그리고 이제야 손희승이 진즉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 길이 없었지 않았는가.
내가 죽은 지 10년 후 그녀 역시 나이 들고 철이 든 후 벌교의 내 무덤으로 찾아와서 오랫동안 넋두리를 했기 때문에 그 자초지종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한줌 하얀 뼈만 남아서 영원히 사막에 묻히기를 바랐다. 사막은 신성했고 신이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몰아의 경지에서 신을 환희로 포옹하는 황홀경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신은 나에게 현현하지 않았다. 사막의 빛이 너무 강렬해서 신을 직시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삶의 지혜에 대한 깨어남 또는 깨달음을 통해서 신을 발견하고 신을 만나게 되는 것일 것이다. 다만, 지금 돌이켜 보면 무상 이라는 신적 경지에서 나는 오히려 ‘신은 모른다.’ 혹은 ‘신은 알 수 없다.’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고 싶었다. 황무지에도 온갖 생명이 넘치는 날이 올 것 아닌가.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만발하고 새가 날고 짐승이 뛰어다닐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마 아득한 훗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회사에서는 담장이넝쿨이 무성한 회사 건물의 앞뜰에서 새삼스럽게 회사장으로 장례식까지 치러주었다. 그건 회장님이 나를 무척 아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날 회장님은 염치불구하고 무척 울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어린 바닷가로, 동생이 묻힌 회색 바다로. 순천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선산으로. 그게 우리 관습이고 전통이니까 어쩌겠는가.
그녀는 그때 술 한 잔을 봉분에 뿌리고 나서 자신도 몇 잔을 거푸 마셨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좋아했던 독한 술이지. 나는 당신한테 고백해야만 하겠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말이야, 하여간에 말을 해야 할 거야. 그래야만 내 속이 풀릴 거거든.
그런데 당신이 죽고 나서 10년이 훌쩍 흘러갔지. 그 10년 동안에? 내 인생이 그렇고 그랬었지.
나는 믿고 있는 거야. 당신은 너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쯤은 천국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있겠지.”
그녀는 처음에는 히스테리에 빠진 것처럼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차츰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때 멀쩡하게 (또는 온전하게) 살아있었고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심현숙을 이해했고, 연민을 느끼고 공감을 하였다. 그러니까 조금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지나간 일을, 오래전의 일을 새삼스럽게 꺼내 이러쿵저러쿵 따져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간은 참으로 좋은 약이다.
그날은 남녘에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지난밤에는 제법 천둥이 치면서 한동안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였다. 오랜 봄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였다. 농부들은 봄 농사 준비에 분주하였다.
그녀는 요즈음도 골프를 많이 치는지 햇빛에 적당히 그을려서 여전히 보기 좋은 얼굴로 건강해 보였다. 그리고 일곱, 여덟 살 쯤으로 보이는 예쁜 여자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녀를 쏙 빼다 닮았다. 아이는 명랑했고 스스럼없이 묘지 주위를 깡충거렸다. 그녀가 재혼한 것인가? 그러나 나는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그녀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애는 너무 귀여워서 꼭 안아주고 싶다. 마치 나의 딸인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딸이라면 내 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와 나는 정식으로 이혼한 적이 없으니 내가 죽은 후 그녀는 미망인으로 상속인이었다.
그 어린 애를 보는 순간 그때 우리는 진정한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수한 생명력이고 아름다운 상징인 그 어린애는 우리의 딸이고 미래의 희망이니까.
돌이켜서, 우리들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미학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탐욕과 쾌락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데 어찌 이를 탓할 수 있으랴. 내 자신이 부끄럽다. 그리고 미안하다. 나의 가족사와 관련된 그 뿌리 깊은 원죄의식과 강박관념 때문에 인간의 자연스럽고 생명의 원천인 일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거부하였으니. 나는 스스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다.
나는 아무튼 남은 생애 동안 그녀가 인생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다만 딸을 잘 키워야 할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날 이해해주다니…….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특별한 감정을 가졌었지.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어. 약간 머뭇거리고 서툴렀거든.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벌써 55살이 되는군. 그때 살았더라면 당신은 무척 강인하니까 100살까지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회사에서는 계속 올라가서 틀림없이 대표이사가 되었을 거라구요. 당신이 올라가기 싫어해도 어쩔 수 없이 올라갔겠지. 회사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구.
아프리카 여행, 그 여행은 내가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건 당신만의 여행이었지. 오직 당신 혼자서 가야만 하는 여행.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그러나 그때 당신의 시체를 찾으려고 타만라세트에 갈 수는 없었어. 내가 그때 남몰래 눈이 빠지도록 서럽게 울기는 했지만…… . 무슨 염치로 거기에 갈 수 있었겠어. 나도 인간으로서 자존심이 남아있었지. 그 도시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켰어. 멀리 바다 건너에서 온 이국적인 이름……
이미 유명한 건축가였거든. 난 당신한테 언제나 열등감이랄까 패배감을 느꼈던 거지. 예술가적 열정이란……. 나는 마음속으로 당신을 의식하면서 자아박탈감 같은 감정을 느껴야 했어. 그게 날 자포자기하게 만들었을 거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반항하고 싶었을 거야. 지금 내가 변명하는 게 아냐…… 그렇다니까…….
가끔 내려올게. 워낙 거리가 멀어서 자주 올 수는 없지만……. 지금쯤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당신은 땅속에 있으면서도 그녀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겠지. 그렇게도 사랑했으니까.
그 사진 기자는 이 년 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었어. 여자인데 용감하게 죽었지.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거의 자살행위였어. 그 여자는 신문사에 있다가 프리랜서가 된다고 뛰쳐나왔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당신의 회사에서 무슨 잡지사로, 다시 신문사로 그렇게 옮긴 거지.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갔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 채, 아마 자신을 향해 증오에 차서 눈에 핏발이 선 군인들이 교차 사격을 하는 모습을 찍으려다가……
당신은 날 끔찍이도 아껴주었던 보호자였지만 그녀에게로 마음이 가버린 배반자였지. 나는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던 거야.
하지만 내가 오해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여자를 무서워하니까.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 때문에 끌린 거지만……. 왜?! 여자가 접근하면 바보처럼 도망가는 거야. 그 여자 역시 하염없이 짝사랑했을 것 같네.
그때는 내 몸 속으로 지금 들어오는 게 누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지. 정체모를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아니면 그게 김규현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 나는 그때 숨을 헐떡이면서도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던 거야. 남자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지. 그래서 힘껏 밀쳐냈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지금도 꿈을 꾼단 말이지. 왜 자꾸 꿈속에 나타나는 거야. 그것도 몽설이었다고. 왜? 날 괴롭히려고? 복수하려고? 그러나 후회하진 않아. 어쩌겠어. 그리고 용서하라고 빌지도 않겠어. 부질없는 짓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결국 용서할 거야.
…… 그랬던 거야. 나는 당신이 사막으로 떠날 때마다 ‘빨리 돌아오세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너무 보고…… 꼭 돌아온다고 약속하세요. 약속을……’라고, 간절히 기도했었지.”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한테는 너무 미안하지. 내가 무슨 말을……. 스스로 경계선을 그었던 거야. 정신적인 경계선을……. 어쩔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 신성불가침의 경계선을 넘은 적이 없었어. 나 자신을 학대하고 싶었던 거야.
그건, 바다에서 죽은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그리고 당신을 포함한 내 주위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고 예의였기도 했지.”

봄비가 다시 굵은 비가 되어 내리면서 목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2016-05-26 10:56:44
121.xxx.xxx.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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