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중편선> 결별의 기억 (上)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6-05-26 10:56:44   조회: 476   
결별의 기억


삶에 필요한 것은 기억력이 아니라 망각 능력이다.


심현숙은 임신 초기 배 속의 태아가 잘 자라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또 임신 초기 징후들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어서 처방을 받기 위해 동네 어귀에 새로 지은 번듯한 5층 건물의 2층에 자리 잡은 ‘김영준 산부인과 의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임신이에요. 초음파 검사 결과 착상이 잘 됐습니다. 그런데 첫 임신이고 나이가 많기 때문에 상당히 신경 써야 할 거예요. 까닥 잘못하면 유산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죠?”
“우선 영양이 중요해요. 임신하면 칼로리와 단백질의 요구량이 증가하거든요. 채소류, 과일, 유제품, 생선, 육류를 많이 섭취하세요. 또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지요. 근육의 강도를 유지하고 유산소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주당 3~5회 정도 30분 이상 운동을 하세요. 수영, 활발하게 걷기, 자전거 페달 밟기, 미용체조 등이 알맞겠죠. 지금 증상이 심한 요통과 좌골신경통은 임신 중에는 매우 흔한 일반적인 증상이에요. 변비, 현기증, 피로감, 빈뇨 증상도 있고, 입덧도 심하다고 하셨죠. 그런 증상을 완화시켜주는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시간을 지켜서 잘 복용하세요.
정기검진을 위하여 당분간은 일주일마다 병원에 오셔야 합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
그가 활짝 웃었다. 희고 고른 치아가 드러났다. 그 잘생긴 외모의 젊은 의사는 첫날부터 너무 너무 친절하였다.
그녀는 병원에 올 때마다 여러 차례 의사 선생님에게 자신의 자궁을 내보이면서 진찰을 받는 과정에서 느꼈던 수치심은 곧 사라졌다. 한 달이 지나면서부터 오히려 병원에 가는 것이 자꾸만 기다려지고 가슴이 설레기까지 하였다. 그녀의 감각기관은 그가 풍기는 풍성한 남자의 냄새를 예민하게 맡을 수 있었다. 그 달착지근하고 저속한 느낌의 체취는 최음제처럼 외설적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마음을 졸이면서 젊고, 잘생기고, 부유하게 보이는 의사에게 정중하고도 은근한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매번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꼭 회신 바랍니다.」
그 젊은 의사도 곧바로 그녀의 핸드폰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 당시 그는 병원일이건, 집안일이건 모든 것이 권태롭고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 위장한 무관심으로 그녀를 대하였지만 그녀가 먼저 절박하게 접근해오는데 이를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눈에 띄는 곱상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고 예뻤으며 부자처럼 보였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의 날씬한 몸매는 부드럽고 육감적인 향기로 감싸여 있었다. 물실호기였다.
그녀가 진찰실 문을 나설 때면, 벌써부터 몸을 해부하듯 그녀의 뒷모습을 훑어보고, 그 성애 찬미자의 칙칙한 시선은 그녀의 엉덩이를 집요하게 집적거리고 있었다.

2. 심현숙은 그 당시 관악구에 있는 신설 사립 중학교의 음악 교사였다.
그녀의 부친은 그 품행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만은 매우 고루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 집에서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날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그녀가 현숙한 여자로 성장해서 현모양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이름을 ‘현숙’이라고 지어줬다. 물론 그녀는 여자 고등학교 시절부터 벌써 그 이름이 구태의연하고 촌티 난다는 이유로 매우 싫어해서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불평을 해댔다. 그녀는 그 유치한 이름 대신 스스로 길거리 작명가가 지어준 ‘심지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녀는 2남 1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순탄하게 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막내로 부모님과 오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니,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발랄하고 깜찍했으며 당돌하였다. 겉으로만 보면 그랬다. 그러나 그 집안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서울 시내 유명 사립대의 교수였지만 자기애성 인격장애 성향을 가진 지독한 술꾼이고 바람둥이였다. 그랬으니 어머니와는 일찍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각기 방을 따로 썼고 거의 대화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꿋꿋하게 맞서 자식들을 지켰지만, 그러나 그 시절 집을 뛰쳐나가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여자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할 무렵 자신은 타고난 목소리와 재능에 비추어 프리마돈나로서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약해서 독창을 소화하지 못했으므로 교회 합창단원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성악 훈련이란 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왕 조용필처럼 피나는 노력으로 득음의 경지에 오를 만큼 강렬한 의지와 욕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힘든 일은 딱 질색이었다.
그 당시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꿈이 아쉬워 크게 상심하였고, 심한 좌절감에 빠져 한동안 방황하였다. 그녀는 대리만족을 위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테너가수가 완전히 변심할 때까지 그를 줄기차게 따라 다니기도 하였다. 그와의 심각한 관계는 일 년을 넘게 지속되었지만 결국 파국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그때 사랑과 정념, 절정과 싫증, 배신과 절망 같은 사랑의 파멸에 따르는 수순들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그것은 젊은 날의 통과의례에 불과하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좋은 혼처 났을 때 결혼이라도 빨리 하라는 엄마의 성화를 못들은 체 하면서 몇 년간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냈다. 그러나 그녀는 여고 시절부터 벌써 남자들이라면 자신만만하였으니 끊임없이 이 남자 저 남자, 잘난 남자들을 찾아서 만나고 곧 헤어졌다. 대개 짧은 만남이었으니 그녀 쪽에서 냉철히 판단하고 끊어버렸던 것이다.
그런 후 아버지 쪽 친척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중학교의 음악 교사로 반강제적으로 취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그녀는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단조로운 학교생활을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있었고, 어느덧 그 생활에 안주하면서 첫사랑의 상처 같은 것은 까마득한 옛일처럼 잊어버릴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별것도 아닌 하찮은 일로 울고불고 질질 짠 자신이 한심했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한층 성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제는 좋은 남자를 만나기 위하여 맞선을 보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잘생기고, 일류 대학을 나오고, 괜찮은 직장을 가진 좋은 조건의 남자를 고르기 위하여 무던히도 많은 남자를 만났던 것이다. 그녀는 유쾌한 남자 사냥꾼처럼 자주 짧게 남자들을 만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 쪽에서 먼저 깔끔하게 정리를 하였다. 그녀는 그때마다 빈틈없이, 필사적으로 계산하고 요모조모를 따졌다.

3. 김규현은 30대 중반쯤에 뒤늦게 중매 결혼한 지 5년쯤 지나서야 아내가 어렵사리 임신을 하였다. 임신 후 아내는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일, 고된 학교일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 했다. 그래서 그가 이참에 아예 학교를 그만둘 것을 그렇게 사정하였지만, 아내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내가 이렇게 통사정할게. 지금 당장 말이지, 제발 학교 그만둬. 그만두면 될 거 아냐. 우리가 얼마나 기다리던 임신이야. 당신과 태어날 자식을 위해서 말이야. 나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고, 월급도 많이 받고 있어. 충분하다고.”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긴박하였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무겁고 짧은 침묵이 집안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외치다시피 하였다.
“뭐가 충분하다고? 그럴 수 없어요. 난 가르쳐야 해요. 나는 담임을 맡고 있는 우리 반 50명 아이들의 이름을 전부 외울 수 있어요. 지금 모든 아이들과 너무 너무 잘 지내고 있단 말이에요.”
“……”
“어떤 경우에도 내가 학교를 떠나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내 일에 참견 말아주세요. 쓸데없는 짓이에요. 그만해요.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기나 해? 뭘 잘했다고 큰소리치는 거야. 모두 당신 때문이야. 나도 지쳤거든. 이제는 끝내고 싶지. 당신과 사는 게 지긋지긋하지.”

4. 그들은 저녁 무렵 청담동의 멋있는 이태리 식당에서 근사한 식사와 함께 포도주를 세 병이나 마시게 되었다. 분위기가 아주 그럴듯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 선생은 결코 의례적인 말로 서곡을 시작하거나 기교적인 은유를 사용해서 시적인 완곡어법으로 작업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산부인과 의사들이 쓰는 의학적 전문용어와 아주 음란한 단어들을 교묘하게 섞어서 말하여 그녀를 즐겁게 하고 들뜨게 해서 성적으로 자극하였다. 그리고 은근슬쩍 스치듯이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손을 만지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여자가 짧은 순간 얼굴을 붉혔다.
여자는 그때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선홍색 입술, 복숭앗빛 뺨, 희다 못해 투명한 목덜미, 여신 같은 자태.
식사대를 지불하는 과정에서도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가 한사코 자기가 내겠다고 우긴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초대한 자리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하였지만, 그는 이런 자리에서는 남자가 계산하는 법이라고 우기면서 기어코 자신의 카드로 계산하였다.
그들은 모두 상당히 취하였고, 기분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2차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들은 그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카페에서, 마치 오래된 연인들처럼 귓불이 닿을 만큼 머리를 가까이 맞대고 다정하게 마주 앉아, 웃고 떠들면서 즐겁게 술을 마셨다.
관능적인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도시의 윤곽선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제 술집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자리를 뜬 것이다. 그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아름다운, 술기운으로 얼굴이 발그레해진 그녀가 온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가 키스를 하였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참으로 멋있고 유쾌한 밤이었다.
그들은 또다시 실랑이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향락의 제단 위에 봉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심전심으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근처 모텔로 가서는 밤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참으로 격렬한 밤이었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말은 필요 없었다. 정말 필요 없었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나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서로의 육체에 접근하는 일은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서 하나하나 밟아 나가야 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은 성급하게 그 과정을 생략해버린 것이다. 그는 피아노 연주자와 같은 섬세한 손길과 관능적인 입술로 번갈아가며 그녀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는 첫날부터 키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하면 서로의 입술을 달콤하게 빨아주는지, 상대방의 혀를 어떻게 음미하며 빨아주는지, 상대방의 침을 어떻게 빨아 먹는지, 어떻게 하면 남자가 여자의 혀를 잘 핥고 빨게 만드는지, 상대방의 입천장을 간질이는 방법 같은 거 말이다. 키스는 침묵의 대화이다. 서로를 해체시킨다. 상대방의 내밀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는 관문이다.
밤의 열기 속에서 굴곡진 육체의 모든 곡선을 쓰다듬을 때마다 엄청난 욕망이 분출하였다. 그는 노련하게 여체의 리듬과 템포에 맞춰 강하게 또는 부드럽게 압박을 가하였다. 그녀의 우윳빛 살결이 꿈틀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고 심장이 격렬하게 펄떡이며 척추뼈는 뿌드득 소리를 냈다.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녀가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목구멍으로 원초적인 쾌감과 신음 소리를 계속 토해냈다. 강력한 이물질이 그녀의 몸속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는 온몸을 휘감고 도는 강렬한 충만감 때문에 그녀는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몇 번이고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였다. 그들의 사타구니에서부터 야비한 욕정이 끓어오르면서 입술과 입술, 육체와 육체가 몇 번이나 맹렬하게 부딪쳤다. 마치 서로를 물어뜯어 삼키려는 두 마리의 성난 맹수처럼…….
그녀는 포만감을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맨살과 맨살이 닿으면서 느끼는 온기와 부드러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었고, 이 순간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 의사는 그녀의 등을 계속하여 쓰다듬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과 좁은 어깨, 매끄럽게 이어진 등뼈를 어루만지면서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깨물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부드러운 살점을 뜯어서 꼭꼭 씹어 삼키고 싶었다. 그녀의 넓적다리가 여전히 떨리고 얼얼하면서 땀이 났다. 그녀는 잠시 동안 공중에 떠있는 느낌, 아니면 모든 것이 멈춰버린 느낌을 받았다. 그의 존재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고, 감정적으로는 그와 자신이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밤의 열기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날 밤 이후 그녀는 침대에서 김영준에게 모든 걸 맡겼다.
그녀는 지금 완벽하게 굴복했다. 그는 이제 그녀의 긴 속눈썹이 단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내뿜는 노골적인 눈빛,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손이 가볍게 그의 몸을 꼬집으면서 전하는 은밀한 메시지, 밤의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침묵으로 내던지는 고함소릴 완벽하게 이해하였다. 그는 그녀의 벌거벗은 육체의 숨겨진 모든 부분을, 그녀의 무한한 욕망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주 만날수록 서로의 육체에 익숙해지고, 온몸의 신경을 짜릿하게 하는 에로틱한 상상에 빠지고, 무한정 섹스에 탐닉하였다. 그러니 만나기만 하면 몇 번씩이나 섹스를 하게 되고 그때마다 노골적인 포르노에서 나오는 그 대담한 행위와 체위를 흉내 내서 바꿔가며 즐겼다. 그래도 그들은 늘 성적 쾌감에 허기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 순간마다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전화통화를 시도하였다. 그즈음 그녀는 자나 깨나 그 의사만을 생각했다. 그의 더없이 싱싱한 얼굴을, 강력한 육체와 전율을 느끼게 하는 손놀림을 상상했고, 그와 자신은 끈끈하게 묶여 있고, 항상 그와 함께 존재한다는 행복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너무 들떠있어서 그래서 그에게 끊임없이 달콤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나는 당신에게서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내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싶다, 잠시의 중단도 없이.」
「당신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우린 빨리 만나야 돼. 조금도 지체 없이.」
「나와 함께 춤을 추라, 내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춤을 추라.」
「내가 마음껏 울도록, 다만 나를 내버려 둬요.」 등과 같이 대개는 어느 그렇고 그런 썰렁한 시집에서 따온 것 같은 지독히 상투적인 것이었다.
여자의 이런 유치하고 달짝지근한 언어적 유희를 즐겁게 소화하려면 남자는 심장이 튼튼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예민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지금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점점 굳히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사랑 때문에 의혹에 빠지거나 끔찍한 불안감을 경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그 사람에 대한 온갖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녀 혼자 있을 때에는 그의 강렬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짜릿한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혔다.
김영준, 의사 선생님, 정말 고마워, 너무 고마워. 그 누구도 당신처럼 날 사랑해준 적은 없었던 거야. 당신 덕분에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살아있다는 실감이 드는지! 당신만 생각하면 짜릿하고, 열이 나지, 온몸이 막 떨리고. 난 지금부터 당신을 끝까지 믿을 거야, 끝까지 사랑한단 말이지, 죽을 때까지 말이야. 몸은 정직한 거야, 그까짓 감정이나 이성은 날 속일 수 있어도 내 몸만은 날 속일 수 없어. 내 몸은 당신을 느끼고 있어. 사랑은 육체적인 거지. 정신적 사랑, 그건 예수님이나 하는 웃기는 소리이지.
그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였을 때의 손바닥에서 땀이 나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발음이 또렷하지 않는 이상한 증상은 이미 사라졌다. 그의 남성적 육체와 체취에 벌써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얼이 빠져 있어서 그 무렵 거의 매일 밤 만난 것 같다. 그리고 매일 황홀한 밤을 보냈다. 어떤 때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저녁도 거른 채 모텔로 직행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제 서로 터놓고 지내게 되었다.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것은 없기야.”라고 말하며, 즐겁게 웃었다. 알고 보니, 그는 그녀와 동갑이었다. 그래서 이상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는, 마누라가 젊은 나이에 갑상선암 중에서 희귀한 미분화암에 걸려 있어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것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담당 의사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마누라가 죽으면 필리핀에 가서,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작은 병원을 차려 잠깐씩만 일하고, 아주 편하게 살기로 작정하였다고 한다. 마침, 마닐라 남쪽 외곽 고급 주택가에는 마누라 부친이 마련해 준 마누라 명의의 단독주택이 있었다. 그는 마누라가 죽으면 이를 상속받아, 그곳에서 시간 나는 대로 골프 치고, 여행이나 하면서 한가롭게 살 작정이라고 하였다.
계산에 밝고, 자기중심적인 그녀는 새삼스럽게 다시 골프 연습을 하기 시작하였다. 너무 열심이어서, 그는 놀랐다. 그들은 그가 멤버십을 갖고 있는 경기도 쪽 골프장에 가서 함께 자주 골프를 치게 되었다. 골프를 친 후에도 피곤한 줄 모르고 어김없이 모텔로 갔다.
그들은 그 당시 이 유쾌한 불륜행각에 대하여 어떤 혼란이나 심적 고통을 맛보지 않아도 될 만큼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 무슨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사태가 너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정념의 불꽃이 완전히 점화되어 버렸다. 활활 타오르는 화려한 불길이 그녀를 꼼짝 못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즈음 그녀의 영혼 속에서는 관능의 불길이 끊임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끔 두려움을 느꼈다. 그에게 너무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가 상실되어 버리지 않을까, 지워져버리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고 매달리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때 그들의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랫동안, 남편과 그녀의 깊은 내면에는 가시 돋친 감정 대립이 불타고 있었다. 그 불씨는 어떤 경우에도 꺼지지 않고 항상 잠복하고 있었다. 그녀를 갉아먹고 있던 그 성가신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족쇄를 벗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해방되었다. 자유롭다고 느꼈다. 한껏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신은 지금부터 그 자유를 무한정 즐기리라.
그녀는 오래 전에 잊었던 생동감 또는 충동감을 만끽하였고, 동시에 달착지근한 승리감도 맛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분노와 고통, 경멸이 말끔히 사라지면서 본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그녀의 생기를 잃어가던 얼굴이 다시 아름답게 피기 시작하였다.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땐 모든 것이 팽창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당시 그 어느 때보다도 발걸음은 가볍고 목소리는 경쾌하였으며, 자주 많이 웃고 크게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남편에게 반발하기 위하여, 또는 복수하기 위하여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긴 것일까. 아니면 느끼한 감각 때문이었을까. 이 삼각관계의 운명을 그녀는 어떻게 예견하고 있는가.
기하학에서 삼각형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은 세 개의 점을 이으면 만들어진다. 각기 두 개의 점이 하나의 선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렇게 이어진 세 개의 선이 삼각형의 변을 형성한다. 삼각형에는 정삼각형, 직각삼각형, 두 변과 두 각의 크기가 같은 이등변삼각형이 있고, 이등변삼각형은 다시 예각삼각형, 둔각삼각형이 있다. 그러나 정삼각형은 같은 크기의 세 각과 같은 길이의 세 변을 갖추고 있으므로 조화를 상징하는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 모든 평면도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질투심이 지배하는 비이성적인 남녀관계에서 삼각관계는 둘은 웃고 하나는 울어야 하는, 또는 하나는 웃고 둘은 울어야 하는, 아니면 셋 모두 울어야 하는 자기 파괴적이고 위험한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셋 모두가 정상적으로 인간다운 남자이고 여자이어서 진짜 미치지 않았다면 그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비이성적인 인간사회의 현실에서 결코 동등한 삼각관계, 즉 정삼각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5.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그녀가 제안을 하였다. 그때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전혀 임신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반드시 피임조치를 하였어요. 잠깐 실수한 거예요. 떼 내 주세요, 아이는 필요 없어요.”
그녀는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대하여 변명을 겸하여 자기 합리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술꾼의 자식을 낳을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 자식 역시 대단한 술꾼일 게 틀림없어요. 술꾼은 정말 지겨워요.”
의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그의 눈가에 잔뜩 심술궂은 웃음이 노골적으로 번졌다.
“잘 몰랐네. 그렇게 형편없는 술주정뱅이인줄은!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만 들어오면 막 발길질하고, 때리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겠네! 술병을 마룻바닥에 내팽개쳐서 박살이 났을 거야. 그러면, 유리 파편이 마구 튀었겠지. 당신, 당신은 그걸 치우면서 훌쩍거렸겠지.”
그러자 그 여자는 정색을 하고 정정하였다.
“그 사람은 매일 밤 비틀거리며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는 술주정뱅이는 절대 아녜요. 2차 이상은 잘 안 가거든요. 술에 취하면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게 그의 오랜 버릇이에요. 가끔 화장실에서 밤새 심하게 토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욕지거리를 하는 일은 없어요. 아주 점잖거든요. 하여튼, 세상 고민은 혼자서 다하는 사람이에요. 그는 만날 술은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는 위대한 살인자라고 욕하면서도 끝끝내 끊지를 못했어요.”
그는 술만 취하면 그때부터 자기연민에 빠진 나머지 자학적이 되어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술을 마실수록 내성이 생겨서인지 웬만큼 마셔서는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얼큰히 취하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술을 마셔야만 하였다. 그는 항상 아슬아슬한 순간 도망치듯 술집을 빠져 나갔다.
신혼 초기에 그녀가 날카롭게 지적하였었다.
“술이 결국 당신을 망쳐서 당신은 제명대로 못 살 거예요. 당신 스스로 그걸 잘 알고 있을 거구요. 그래도 술을 마실 겁니까? 지금 당장 술을 끊으세요. 필요하다면 적절한 치료도 받으세요.”
그는 매번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난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더욱이 알코올 중독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 난, 취하지 않지. 취하는 게 싫거든. 나의 몸속에서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왕성하게 작용하거든. 술꾼들이 그따위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중얼거리고, 소릴 질러대는 것은 정말이지 질색이거든. 자신을 언제든지 컨트롤하고 있지.
내가 조금씩 술을 마시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부인하지 않거든. 그렇지만 그건 단지 업무상 긴장을 풀기 위해서야. 아주 가끔씩 조금 지나치게 마시지만, 그땐 회사 사람들하고 함께 마시지. 절대로 혼자서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구. 지금 내 위장은 알코올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 요즈음은 술을 많이 마셔도 거의 토하지 않고 있거든.”
그렇지만 그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술에 탐닉하기 시작하였는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벌써 우울한 기분이 되면 혼자 몰래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지만, 아마 회사에 입사하여 설계 부서에 배치되고 나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복잡한 작업과정에서 술은 지치고, 과민해진 신경을 달래주는 이완제 역할을 하였을 것이고, 그의 상상력이 고갈되어 갈 때 그의 영감을 자극하기 위하여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증세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음주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음주는 더 이상 의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그의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고, 몸에 배어버린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래도 남편일이라고 열심히 편을 드는군.” 하고, 그 의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혹시, 의사의 양심 때문에 꺼려하는 거야? 하지만, 당신이 해주지 않으면 다른 데 가서 할 거예요. 제 결심은 확고하니까요. 산부인과는 널려 있어요. 그러나 당신께 부탁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것보다는 당신이 낫겠죠.”
“전혀…… 상관없으니까. 얼마든지 오케이야. 난 산부인과 전공이거든. 염려 놓으시라구요.”

그 며칠 후, 그는 임신중절 수술을 하기 위하여 그녀를 자기 병원의 수술대 위에 눕혔다. 그때 그녀는 몹시 초조하여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피로와 두려움이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진담인지, 농담인지를 하였다.
“자기 그것은 아무리 봐도 잘생겼는걸. 냄새는 말이야, 축축한 이끼 냄새가 나지. 그러니까 맛이 좋지, 쫄깃쫄깃하단 말이야. 왜, 우리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 않았어……”
그는 부드럽게 검은 털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그녀의 둔덕을 몇 번씩이나 쓰다듬었다. 그녀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몸을 꿈틀거렸다. 그녀는 이제 공포심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긁어내는 데는 약간 늦은 감이 있지만…… 걱정 말라고. 금방 끝날 거야. 내 솜씨를 믿어야 해. 나는 이 수술을 수백 번도 더 해봤으니까. 앞으로도 수천 번, 수만 번은 더하게 되겠지.”
그러면서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궁 내 모든 조직을 제거하기 위해 그녀의 자궁벽을 샅샅이 긁어냈다. 그 작업은 너무나 간단하고 손쉬운 일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고귀한 한 생명이 말살되었다는 죄의식 같은 것은 눈곱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적극 원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지구상에 인구가 넘쳐나므로 그 수술은 인구 조절에 유용할 것이었다. 자신이 먼저 하지 않으면 다른 산부인과 의사가 수술할 것이고 그 수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는 오로지 많은 돈을 벌어야 하였다.
늦은 가을 한가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작은 창문을 통하여 병실로 들어와 복잡한 심정으로 수술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을 잠깐 비추고 사라졌다. 산부인과 병원의 잔인한 악취가 그녀의 코끝을 찔렀다. 이제 그녀의 몸속에서 남편이 남긴 흔적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우리가 얼마나 기다리던 임신이야.”라고 절실하게 말하던 남편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살인행위는 아니야. 절대로……. 그 무시무시한 단어가 싫어. 소름이 끼치니까. 이건 단순한 거야. 흔해빠진 유산의 일종에 불과한 거야.
내가 오해한 걸까? 그 여자 말이야? 배신감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모든 게 당신 탓이지. 당신이 문제인 거야. 당신은 사막에 미쳐버린 사람이니까, 사막에서 살다가 끝내 사막에서 죽을 운명이지. 난 사막 같은 것은 딱 질색이야. 문명사회에서 살아야만 돼, 화려한 도시에서 살아야 된단 말이야.
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아마 마지막으로 선물을 준거야. 틀림없이 난 그와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그러니까 그를 놓치면 절대 안 되지. 그는 잘 생기고 능력 있지. 나와는 모든 게 잘 맞아, 너무 잘 맞지……. 모든 자세가 잘 맞는 거야. 앞으로 해도, 뒤로 해도, 아무렇게 해도 잘 되는 거야. 항상 기진맥진해서 끝장을 보지. 만족스러워, 만족스러운 거야. 성불능자인 그 애송이 테너, 너무 고지식한 당신, 그리고 다른 어설픈 자들과 완전히 다른 거야. 그는 확실하게 챔피언이야. 나는 이미 당신을 버렸어. 그 족쇄를 스스로 벗겨냈지. 난 지금 자유란 말이야.
그 여자는 곧 죽을 거야. 하루 빨리 죽어야만 하지.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은 쓸데없는 짓이지. 내가 써야할 돈을 병원비로 까먹고 있으니까. 그 여자가 빨리 죽게 무슨 푸닥거리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어쨌거나 우리도 이혼해야 할 거야. 나는 법적으로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아무튼 당신에게 미안하긴 해. 그러나 난들 어쩔 수 없다구. 어쩔 수가……’
수술이 끝난 후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 의사는 세면대에서 두 손에 잔뜩 비누칠을 하여 피부가 벗겨질 만큼 박박 문지르며 씻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이건 유산이에요, 알았죠. 비밀을 철저히 지켜주세요. 무덤까지 싸 가지고 갈 비밀이에요.”

6. 그 당시 그녀는 학교 업무 때문인지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기 시작하였고, 무슨 일이건 짜증내는 일이 많아졌다.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학교 일로 무리를 거듭해서인지, 결국 임신 4개월여 만에 그만 유산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유산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아내가 과로해서 유산한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도저히 다른 상상을 할 수는 없었다.
1997년 11월 말경이었다.
김규현은 유산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충격으로 그는 망연자실하였다. 갑자기 밀려드는 검은 어둠이 그를 덮쳤다. 곧 가슴 속에 차갑게 응어리져 있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그의 단정한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싸늘한 입술에 새겨진 그 분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 결혼을 인생의 최대 실수로 간주하고 저주하였다. 그러나 아내가 임신하고 출산을 하여 귀여운 아기가 태어났다면 서로 간의 어떤 불일치나 불화는 얼마든지 해소될 수 있었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있었다면…… 쌔근쌔근 잠든 그 아이의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볼 수 있었다면…… 해소될 수 있었을 거야. 한때는 당신을 넋을 잃고 쳐다보느라 눈이 멀 정도였던 시절도 있었고…… 밤마다 침대에서 코를 비비고 입술로 깨물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나의 가슴팍에 얹었던 손의 가벼운 무게를 기억할 수 있고, 뽀얀 살 속 보이지 않는 혈관의 불규칙한 맥박을 지금도 느낄 수 있지. 그 시절에는 당신은 꿈에서 깨어나면서 나를 더듬으며 말했었지. 꼭 안아줘요. 내가 나쁜 꿈을 꾸었나 봐요.’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과로로 유산을 하였단 사실 말이다. 그 후, 두 사람 사이는 급속도로 냉랭해지고, 사사건건 충돌하고, 자주 심각하게 말싸움을 하였다. 부부싸움과 눈물, 맞고함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싸우고 또 싸웠다. 고통, 눈물, 충격, 분노의 감정들이 뒤엉켰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모멸감 때문에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소프라노 목소리로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때로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심한 분노 때문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끔찍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고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천천히 숨을 내쉴 수 없었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그때 그 멋있고 신비한 술, 소폭을 많이도 마셨다. 인생이 허무하고,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집요한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매일 혼자서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 그는 갈증을 면하기 위하여 매일 술을 들이켰고, 갈증이 없어도 갈증을 예방하기 위하여 또 술을 마셨다. 술은 충실하게 마취제 역할을 하였으므로 그 신비한 액체는 아주 잠시이긴 하지만 효과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때는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아무 술이나 닥치는 대로마시고 또 마시고, 토하고 또 토하기 일쑤였다. 그런 다음 식사를 끊었다. 그는 평생 동안 술을 좋아했지만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었고 그 때문에 폐인이 되었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는데 마침내 중독자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술을 끊어야 하거나 줄여야했지만 그러면 금단 증상이 왔다.
그 무렵 그 심각한 증세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자 이를 견뎌내기 위하여 더욱 술에 의존하면서 매일 술을 마시게 되었고, 술만 마시면 만취한 상태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는 그만 마셔야 하는 줄 알면서도 매번 끝까지 갔다. 그리고 몸을 겨우 추스를 정도로 취하여 방배동 뒷골목 연립주택으로 가는 긴 골목길을 비틀비틀 걸으면서, 때로는 집에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느릿느릿 갈지자로 걸으면서, 터져 나오는 괴성 같은 울음을 참아내기 위하여 늘 낮은 목소리로 낡은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렸다. 그는 그 기교적이고 여운이 남는 가사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 우울한 선율이 그를 가슴 저리게 하였다. 그때 초겨울이 되어 희미한 가로등이 졸음에 겨워 하품을 해대는 골목길에 불어 닥치던 시린 바람이 그의 가엾은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늦은 밤, 그는 취기로 흐려진 눈에 악의를 가득 담아서 아내의 방을 쏘아 보았다. 그 방에서 매번 가볍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문틈으로 새나오는 그녀의 불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면 그녀가 짐짓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었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같은 맹추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한강에는 얼음이 꽁꽁 얼고 얼음 조각들이 강의 중심부에서 동동 떠내려갔다. 차가운 바람 끝이 얼마나 매섭든지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사람들은 추위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해는 유난히 눈도 많이 내려서 도시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였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이 될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는 몹시 암담하였다.
그때 회사는 미증유의 경제위기인 IMF 사태를 그럭저럭 잘 극복하고 있었다. 그는 회사의 3월 정례인사 때 대표이사와 면담한 후 리비아 대수로 공사의 현장 근무를 자원하였다. 견딜 수 없이 답답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때는 아내와의 사이에 어느 정도 냉각기가 필요하였다.
2016-05-26 10: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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