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중편선> 결별의 기억 (下)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6-05-26 10:54:49   조회: 436   
결별의 기억 (下)

7. 그녀의 남편이 리비아의 공사현장으로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그의 부인도 죽었으므로 그들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사실 솔직해야 하리라. 심현숙은 내심 그녀가 빨리 죽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하였던가. 그녀가 죽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마나 희희낙락하였던가.
그 역시 아내의 죽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별반 슬퍼하지도 않았다. 아내가 건강했던 시절에도 그와 아내와의 사이는 그저 데면데면했으니까. 다른 바람둥이 남편과 그의 현모양처형 아내 사이처럼 말이다.
그의 아내는 용도조차 알 길이 없는 각양각색의 약들을 먹으며 그 지독한 항암치료를 받았고 자주 지독한 통증 때문에 진통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녀는 새까만 설사를 지렸고 플라스틱 통에 검은 토사물을 쏟아냈다. 그때마다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이제 아내의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았다. 한동안 욕창 때문에 고생했다. 탄탄했던 엉덩이 살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살가죽이 골반뼈를 간신히 덮고 있다. 아내는 죽음의 사신을 향해 진즉 투항했고 더 이상 얼굴에 고통의 표정은 없었다.
그러나 남편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바람둥이 자식……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네 놈이…… 치사한 자식 같으니라고…….’
의사 김영준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처에게 최선을 다해다는 것을 남들에게 (특히 결혼할 당시 키를 몇 개씩이나 건네준 처가 쪽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몸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기까지 했다. 그가 난폭하게 전기 충격기를 누르자 강력한 전류가 그녀의 몸에 흐르면서 모니터 스크린의 푸른색 파동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김영준은 땀을 뻘뻘 흐리며 그녀의 가슴을 계속적으로 짓눌렀다. 그러나 그게 무슨 허튼 짓거리인가.
그래도 아내는 담당 의사가 예상했던 6개월보다는 3개월여를 더 살다가 죽었다.
그녀는 그 무렵부터 그의 압구정동 큰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다시피 하였다. 그녀는 그의 욕실에서 화려한 비누 거품으로 목욕을 했고, 부엌에서는 그녀가 자신 있게 요리할 수 있는 카레 요리를 만들었으며, 그의 신용카드를 함부로 사용하였다.
그는 아내가 죽자 내심 홀가분했다. 몇 개월쯤 지나서 벌써부터 병원 문을 닫고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이민을 준비하였다. 그녀 역시 학교를 그만두고, 남편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별다른 의식 없이 그 젊은 의사에게 순식간에 빠져들면서 그냥 즐기기 위하여 출발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와 김영준 사이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미리 아주 세심하게 계산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가을 산에 산불이 번지는 것처럼 급속한 사태의 진전에 따라 여자의 맹목적 욕망이 분별없이 초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아내가 악성 암에 걸려서 오늘내일하는 상황에서 그와 깊숙이 사랑에 빠지자 이제 무한정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남편은 해외로 떠나고 남자의 아내는 저세상으로 떠나는 일련의 과정에서, 더욱 확실한 관계를 추구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다. 그녀는 벌써 그의 아내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그 무렵부터 남편과 이혼하고 그 의사와 확실한 관계를 맺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몹시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일방적인 생각에 불과한 것이고, 남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녀보다 더 젊고, 더 예쁘고, 더 돈 많은 여자를 물색 중에 있었다.
그 당시 일의 진척은 의외로 지지부진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답답할 정도로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그는 예전처럼, 우린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공동운명체라는 달콤한 말을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그는 팽팽하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라고 깨닫고 있었다. 불꽃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사랑하는 상대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날 지경이었다. 서로의 매력에 끊임없이 흠뻑 빠져 있어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일을 할 때에도 온통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서로 완전히 몰두해 있어서 그것은 짜릿한 전율로 다가왔다. 그를 생각하면 생각할 때마다 그녀의 내장과 항문, 자궁 속에서 무언가, 욕망이 무섭게 타오르다 흐물흐물 녹아서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스러운 생명,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것이다. 그녀는 생각하였다. ‘그의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것도 하루 빨리, 딱 한 번은 임신해야 할 거야, 그래야만 그를 옭아맬 수 있으리라.’
그래서 지칠 줄 모르고 그것에 탐닉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실제의 욕망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과도한 것이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너무나 강렬했던 최초의 불꽃은 서서히 사그라지는 법이다. 그러한 흥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곧 심드렁해지기 마련이고, 그러면서 허망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호적을 같이하는 부부 간에도 사랑은 가변적이어서 쉽게 변색되고, 변주되고, 왜곡되는 법인데, 하물며 불륜의 관계에서는 육체적의 쾌락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그 강도가 급속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이 너무 깊숙이 진창에 빠져든 것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의 경우처럼 아주 적절한 시기에 발을 뺐어야 옳았다. 그는 항상 만나는 여자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싫증이 나면 곧바로 돌아서 버렸다. 여자가 입게 될 마음의 상처 따위는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번 헤어진 사람과는 다시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여자와 헤어지면서 가슴이 찢어질 듯한 상실감 같은 걸 느끼는 일은 없었다. ‘이건 단순한 불장난에 불과한 거야. 여자 쪽에서도 눈치껏 알아차려야 할 거야, 그걸 모르면 둔감하거나 머리가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의 경우에는 아내가 암에 걸리고, 그리고 죽는 과정에서 그 뒷수습을 하면서 몹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 시기를 놓친 것뿐이다. 진작 과감하게 잘랐어야 하였다. 이제는 마지막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고, 그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러자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일시 유예 상태에 있었던 그녀에 대한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심각한 것까지 온갖 종류의 미움과 역겨움, 권태와 불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그녀가 더욱 보기 싫어졌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젠 지겹군, 지겨워. 그 여자한테 신용카드를 맡긴 게 큰 실수였던 거야. 제멋대로 명품 백을 몇 개씩이나 사고, 열흘이 멀다하고 청담동에서 비싼 옷을 사 입으니 감당할 수 있느냐 말이야. 정리해야만 하지. 이번에는 시간이 좀 걸렸어. 여자란 싫증이 나면 그걸로 끝인 거야. 사태가 잘못 돌아가면 그저 도망쳐야…… 삼십육계가 최고인데……. 나는 언제나 날쌨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이 지경까지. 실기해서는 안 되는데……. 긴 말은 필요 없는 거야. 그래봐야, 구차하게 될 테니까. 딱 한마디만…….’
여자는 이제 수줍어하지 않았다. 그 수줍은 미소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점점 살찐 얼굴이 퉁퉁 부은 것 같고. 몸에서는 시큼한 땀 냄새가 나고. 밤이면 가끔 약간이긴 했지만 코를 골고.
미적미적 대던 김영준은 어느 날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짤막하게 말하였다. “글쎄, 지금 떠나기는 적당하지 않아.”
그는 요즈음 그녀 만나기를 극력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만난 경우에도 그들의 대화는 겉돌기 시작했다. 애정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말은 그저 건성이어서 머릿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때때로 까닭 없이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일이 점점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자의 변덕에 비위를 맞추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바람처럼, 하늘의 뜬 구름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가끔 너무 세게 깨물었기 때문에 그녀의 젖꼭지에서 느껴졌던 상큼한 통증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그 무렵 그녀는 계속 너무 긴장을 해서 온 몸에 난 모든 털들이 곤두서 있었고 배 속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당신, 언젠가는 날 떠날 거야.”라고 우울하게 말하면, “아니,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네가 날 떠날 리도 없을 테지.”라고 그가 단정적으로 말했었다.
그녀는 스스로 다짐하였다. 널 놓아줄 수는 없어. 순순히 놓아줄 수는 없지. 어떻게 잡은 마지막 기회인데……. 넌 나에게 이미 코가 꿰여버린 거지. 그녀는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파트 문은 늘 굳게 잠겨 있었고, 그는 예고도 없이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곤 하였다. 핸드폰 번호도 바뀌었고, 메시지가 끊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의지, 마지막 인내심이 급속히 붕괴되었다. 그것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맞이한 이별 같지도 않은 이별이었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우린 끝난 거지. 미련 없이 끝났어!”
“당신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 당신을 이해할 수 없거든.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 놓고, 마음대로 죽이겠다는 거지. 그러면 안 되지. 천벌을 받을 거야. 다시 생각해봐. 돌아와 줘. 내가 이렇게 사정할게.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
“멍청하긴……. 혼자서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걸 몰라서 그래?” 그의 치켜뜬 두 눈은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분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개자식 같으니라고…… 사기꾼 자식.”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가로수길 거리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은행나무 가지와 잎에 닿아서 서걱거린 후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한 폭의 정물화처럼 완벽해 보였던 미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그 사랑이란 존재가 지금은 가장 큰 고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 남자와 한 모든 약속과 맹세는 지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녀는 그를 증오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녀는 기억나는 온갖 독설을 동원하여 그를 저주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녀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한 감정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이 턱턱 막히고,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에 통증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녀는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여전히 두통이나 어지럼증이 나타나고 밤에는 심한 불면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어떤 때는 두려운 감정이 폭발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였고, 극히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기도 하였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화병과 우울증이 겹친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심하게 질책하였다. 그러나 몇 달 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증세는 급속히 완화되기 시작했고, 분노마저 금세 멀리 사라졌고, 그리고 그녀는 그까짓 거 단념하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그런데도,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 남자에게 수십 번씩이나 허벅다리를 벌리고 그를 받아들인 자신이 역겹게 여겨졌다. 정말 구역질나는 일이었으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의 자존심은 짓이겨질 대로 짓이겨졌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그러니까 수술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가 말했다. “이제 몸도 가벼워졌으니 스리섬 해보는 게? 어때?”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게 뭔데?” “순진한 척하지마. 그게 어때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야. 남자 한 사람과 여자 두 사람 또는 여자 한 사람과 남자 두 사람이 하는 거 말이야. 그게 지금 은근히 퍼지고 있거든. 스리섬하며 함께 히로뽕을 하면 금상첨화일 거야. 하늘을 훨훨 나는 기분 아니겠어?” “그까짓 것…… 뭐…… 못할 것도 없지만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녀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리석게도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은 것은, 그리고 지금 마음고생을 해봤자 그건 정말 바보짓이었다. 그에게 고함을 질러주고 싶었다. 다시는 그 자식을 보지 않아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언제가 우연히라도 그 뻔뻔한 자식을 만나게 되면 거침없이 그 자식의 못된 얼굴에 침을 뱉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딴 자식한테 당하다니……. 그런 성도착자이고 변태한테 말이지. 그때 그 자식의 정체를 알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 그 역겨운 자식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그는 사막의 전갈처럼, 독사처럼 사악하고 위험한 존재라도 되는 걸까. 아니야, 아니야, 그를 무시해야만 하지. 끝났지, 끝났어. 당신하곤 끝났어. 당신의 냄새가 역겹지. 그때 카페에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어야 하는데. 그때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녀가 불쾌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았기 때문에 차마 못한 거지.
김영준. 악몽. 실패. 수모. 더 이상 나 혼자서 이런 고통을 당할 수는 없는 거야. 영원히 끝장을 내버려야만 되지. 이 모든 것에 내가, 바로 내가 마침표를 찍는 거야.”

8. 김규현은 여름휴가 동안 사하라 사막의 남쪽을 여행하기 위해 트리폴리에서 부정기선 전세기에 편승하여 알제리의 타만라세트로 내려왔다. 그러나 사막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15일째 모래언덕 계곡에 갇혀있다. 지금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음을 앞두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밤의 한기가 담요를 덮고 있는 삐쩍 마른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 지독한 추위도 이제 마지막이야.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모호하고 아득한 어머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는 존경받는 자이고 멸시받는 자이다. 그녀는 타락한 자이며 거룩한 자이다. 그녀는 아내이고 처녀이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딸이다…… 그녀는 지식이며 무지이다.
그리고,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1998년 늦은 봄. 토요일 석양 무렵. 황혼의 빛깔은 마치 무지개를 층층이 쌓아 놓은 것처럼 불타는 분홍, 장밋빛 분홍, 짙은 회색 분홍으로 변하고 있었다. 세상의 풍경이 황금빛 석양에 물들고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본다. 시뻘건 해가 석양 저편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그는 그때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에서 방배동 쪽으로 아주 느릿느릿 길을 걷고 있었다.(그때는 아프리카로 가는 출국 준비가 거의 끝나서 홀가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6월 초순경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는 그녀와 길에서 갑자기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깜짝 놀란다. 그는 손희승을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그녀가 곧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녀가 새로 창간한 패션 전문 잡지의 사진기자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죄송해요. 얼마 전에 회사를 옮겼지요. 말씀드릴 기회가……. 건축 쪽 현장 사진은 어지간히 찍었거든요.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었지요. 자세한 이야기도 없이…… 그냥 그랬어요.” 두 사람은 짧은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면서…… 잠시 환한 미소에 잠긴다. 서로 반가워서 손을 잡을 듯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주춤거렸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녀에게 심술이 나서 빈정대고 싶었지만 꽉 막혀버린 목구멍에서 말이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가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골목길로 꺾어지는 모퉁이에 너무 빨리 도달했다. 거기서 잠깐 멈추었고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려고 하였지만 눈물이 글썽거려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뒷골목길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렸다.
회사의 직원과 현지인들로 구성된 구조대에 의해 김규현의 시체는 석양 무렵에 발견되었다. 태양이 서쪽 모래언덕 너머로 사라지면서 아주 잠시 붉은 잔영이 사막에 여린 빛을 드리우다, 곧 어둠이 찾아왔다.
죽은 그의 얼굴이 너무나 평온해 보여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깨어나지 않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육체는 그동안 음식물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였고, 몸속의 모든 수분이 전부 증발하면서 너무 말라, 위장과 등골이 맞붙어 있을 만큼 뼈와 가죽만이 남아 있었다. 뼈밖에 남지 않은 깡마른 몸에 걸친 옷이 너무 헐렁해서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잠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그는 아주 부드러운 모래침대 위에 태평스럽게 누워 있어서, 얼굴에 고통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강인하고 섬세하였던 이목구비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다만 그의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와 신중한 눈빛은 살며시 감긴 눈꺼풀 속에 감춰져 있었다. 그의 눈은 살아생전에는 어둡고 그윽해서 언제나 저 멀리 지평선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대계 이집트인 의사가 동행하였다. 알리마르크는 그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본 후 그가 죽은 지 채 하루가 안 되었다고 말했다. 일 년 전쯤, 트리폴리의 병원에서 처음 보았을 때 약간 수줍어하던 그 눈빛, 조금 슬퍼보이던 매일 물과 우유를 많이 마시라고 충고한 일이 엊그제 같았다.
구조대는 모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트럭 밑 은신처로부터 직선거리로는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야트막한 모래언덕 너머에 진을 치고, 며칠째 모래언덕 사이 침식으로 파인 협곡을 뒤지면서, 그들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 거리는, 그가 단지 ‘여기! 여기! 여기야! 우리가! 우리가 살아있어!’ 하고 외쳤으면, 사막의 건조한 대기 속에서 정적을 깨고 바람에 실려서 바로 닿을 수 있는 그렇게 짧은 거리였다. 그러나 바람에 휩쓸린 모래 먼지가 트럭 주위를 두껍게 뒤덮고 있어서 그들은 쉽사리 트럭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어.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야. 어떤 사람이 한계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처해 있어도 대부분의 경우 그 결과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만큼 별것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 아주 이따금씩 그 결과가 극도로 나쁜 경우가 있을 뿐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알리마르크가 체념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사망확인서를 작성하였다.


Certificate of Death
Name: Kuhyun, Kim
Date of Birth: 20. 11. 1955.
Nationality: South of Korea
Final Destination: passing stay for the desert journey at the south
side of the Sahara
Cause of Death: mental derangement by dehydration and self
murder

9. 가을이 하루하루 더 깊어가고 있었다. 가을이 기진맥진한 채 저 멀리 가고 없었다. 단풍으로 물들었던 가을 나무들이 어느새 앙상한 가지만 남겨놓은 채 잎들을 낙엽으로 내려놓았다. 낙엽은 모든 추억을 데리고 사라졌다. 공기는 여전히 깨끗하고 투명하였다. 가을의 단풍들은 떠난 지 오래되었고, 눈은 아직 먼 것 같다.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겨울은 겨울이었다. 마지막 낙엽이 겨울을 몰고 온 것이다. 겨울은 계절의 끝물이다. 햇볕이 여리고 나무들은 헐벗었으며, 겨울바람은 너무 스산하여 다른 계절과는 그 느낌부터가 다르다. 겨울은 황량하고 마음의 병이 더욱 깊어지는 계절인 것이다. 따뜻했던 날들은 지나갔다.
그가 죽은 후 벌써 6개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시간은 깊은 강물처럼 소리 없이 흐른다. 그의 영혼은 지금도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 홀로 누워 있을 것인가? 여기저기 날아다닐까? 그곳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곳일까?
도시는 이제부터 몇 달 동안은 잿빛 겨울 속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겨울은 인간의 신음소리로 가득 찬 괴물이었다. 겨울 하늘로부터 여린 광선이 도시의 지붕 위로 무기력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밤이 되면 거리는 칠흑 같이 어두운 저녁 빛이 감싸고 있어서 갑자기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쓸쓸한 겨울바람이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어둠침침한 새벽 거리를 지나쳐 갔다. 아직 완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새벽의 색조가 스며들어오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새벽의 단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의 유령은 벌써 사라지고 없는데도 말이다. 그 새벽을 달곰씁쓸한 꿈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해의 비정하고 메마른 겨울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도시의 겨울이 이렇게도 쓸쓸하고 적막한 지는 처음 알았다. 황홀한 순간은 덧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짧지만 행복했던 시절의 화려한 광채는 사라져 버리고, 짙은 안개 같은 허무만 남았을 뿐이다. 이제서야 새삼 자신의 허영심을 탓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그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초췌한 얼굴이 더욱 굳어 있었고, 가끔 멈칫거리면서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그해의 우울한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고 몹시 추웠다. 그리고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점점 더 그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처음 데이트하던 날 그녀의 마음을 빼앗은 그 수줍어하던 다정다감한 눈빛이 새삼 생각났다. 그만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일찍이 있었던가, 그만큼 그녀를 순수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문득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패배자였다. 덧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오랜 세월을 허둥댄 철저한 패배자임을 깨달았다.
‘나 같은 하찮은 사람까지 자유를 남용하였으니,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거야. 내가 그를 죽게 한 거나 다름없어. 그는 위대한 건축가가 될 수 있었지. 그의 아름다운 꿈을 함께 죽인 거야······. 그러나 그는 어차피 사막에서 죽을 운명이었어. 그는 거길 죽음을 찾아서 갔던 거였어. 그가 사하라의 맨 밑바닥 구석까지 그 엉뚱하고 절망적인 여행을 떠났던 것을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 있겠어. 나는 그 운명을 일찍이 예감하고 있었지. 그는 항상 어디론가 떠나야 했어. 그를 내게 붙잡아 둘 능력이 없었지. 당신 혼자 떠나는 당신만의 여행. 그 때문에 저항한 거지. 지긋지긋했거든. 그러나 당신이 떠날 때마다 절망적이었지.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에 이별을 준비했거든.’
그 무렵,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그녀의 마음을 정화시켰다. 하지만 눈물은 빨리 말랐다. 그녀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모든 일이란 게 역시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그녀의 그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다시 그녀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괜찮은 남자 (잘생기고, 고급 외제차 정도는 타고 다니는, 돈 많고, 힘 있는 남자, 그렇다면 나이는 약간 들어보여도 괜찮지 않을까) 찾기에 열중하였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나이 들어 여자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자신감을 잃어서는 안 되리라. 그녀는 다짐하였다.
그가 거울 속에서 생전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간절히 손짓을 하였다. 그의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바람도 쏘일 겸해서 남쪽 바다 쪽으로, 사하라 사막에 갔다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사막에 가기 위해서 적당한 패키지여행 코스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부심이 강하고 냉정하고 고집이 센 여자. 강력한 자아가 똑똑한 그녀를 지탱한다.
2000년. 서울의 겨울. 그 겨울이 사라져간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반복과 순환.

에필로그
나는 살아생전에 김영준과 심현숙의 만남과 열렬한 사랑, 배신과 결별의 과정을 까마득히 몰랐다. 그리고 이제야 손희승이 진즉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 길이 없었지 않았는가. 내가 죽은 지 10년 후 그녀 역시 나이 들고 철이 든 후 벌교의 내 무덤으로 찾아와서 오랫동안 넋두리를 했기 때문에 그 자초지종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한줌 하얀 뼈만 남아서 영원히 사막에 묻히기를 바랐다. 사막은 신성했고 신이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인간은 삶의 지혜에 대한 깨어남 또는 깨달음을 통해서 신을 발견하고 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고 싶었다. 황무지에도 온갖 생명이 넘치는 날이 올 것 아닌가.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만발하고 새가 날고 짐승이 뛰어다닐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마 아득한 훗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어린 시절 추억이 어린 바닷가로, 동생이 묻힌 회색 바다로. 순천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선산으로. 그게 우리 관습이고 전통이니까 어쩌겠는가.
그녀는 그때 술 한 잔을 봉분에 뿌리고 나서 자신도 몇 잔을 거푸 마셨다.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좋아했던 독한 술이지. 나는 당신한테 고백해야만 하겠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말이야, 하여간에 말을 해야 할 거야. 그래야만 내 속이 풀릴 거거든. 그런데 당신이 죽고 나서 10년이 훌쩍 흘러갔지. 그 10년 동안에? 내 인생이 그렇고 그랬었지. 나는 믿고 있는 거야. 당신은 너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쯤은 천국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있겠지.”
그녀는 처음에는 히스테리에 빠진 것처럼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차츰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때 멀쩡하게 (또는 온전하게) 살아있었고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심현숙을 이해했고, 연민을 느끼고 공감을 하였다. 그러니까 조금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지나간 일을, 오래전의 일을 새삼스럽게 꺼내 이러쿵저러쿵 따져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간은 참으로 좋은 약이다.
그날은 남녘에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지난밤에는 제법 천둥이 치면서 한동안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였다. 오랜 봄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였다. 농부들은 봄 농사 준비에 분주하였다.
그녀는 요즈음도 골프를 많이 치는지 햇빛에 적당히 그을려서 여전히 보기 좋은 얼굴로 건강해 보였다. 그리고 다섯 살 쯤으로 보이는 예쁜 여자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녀를 쏙 빼다 닮았다. 그녀가 재혼한 것인가? 그러나 나는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그녀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애는 너무 귀여워서 꼭 안아주고 싶다. 마치 나의 딸인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딸이라면 내 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와 나는 정식으로 이혼한 적이 없으니 내가 죽은 후 그녀는 미망인으로 상속인이었다.
그 어린 애를 보는 순간 그때 우리는 진정한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수한 생명력이고 아름다운 상징인 그 어린애는 우리의 딸이고 미래의 희망이니까.
돌이켜서, 우리들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미학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탐욕과 쾌락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데 어찌 이를 탓할 수 있으랴. 내 자신이 부끄럽다. 그리고 미안하다. 나의 가족사와 관련된 그 뿌리 깊은 원죄의식과 강박관념 때문에 인간의 자연스럽고 생명의 원천인 일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거부하였으니. 나는 스스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다.
나는 아무튼 남은 생애 동안 그녀가 인생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다만 딸을 잘 키워야 할 것이다.
그녀가 떠나던 날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날 이해해주고 용서해 주다니…….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특별한 감정을 가졌었지.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어. 약간 머뭇거리고 서툴렀거든.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벌써 55살이 되는군. 그때 살았더라면 당신은 100살까지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어.
아프리카 여행, 그 여행은 내가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건 당신만의 여행이었지. 오직 당신 혼자서 가야만 하는 여행.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그러나 그때 당신의 시체를 찾으려고 타만라세트에 갈 수는 없었어. 내가 그때 남몰래 눈이 빠지도록 서럽게 울기는 했지만…… . 무슨 염치로 거기에 갈 수 있었겠어. 나도 인간으로서 자존심이 남아있었지. 그 도시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켰어. 멀리 바다 건너에서 온 이국적인 이름이었거든.
가끔 내려올게. 워낙 거리가 멀어서 자주 올 수는 없지만……. 지금쯤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당신은 땅속에 있으면서도 그녀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겠지. 그렇게도 사랑했으니까. 그 사진 기자는 이 년 전에 죽었어. 여자인데 용감하게 죽었지. 그 후, 손희승은 신문사로 옮겼던 거야.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갔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 채, 아마 자신을 향해 증오에 차서 눈에 핏발이 선 군인들이 교차 사격을 하는 모습을 찍으려다가…… 당신은 날 끔찍이도 아껴주었던 보호자였지만 그녀에게로 마음이 가버린 배반자였지. 나는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던 거야.
그때는 내 몸 속으로 지금 들어오는 게 누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지. 정체모를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아니면 그게 김규현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 나는 그때 숨을 헐떡이면서도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던 거야. 남자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지. 그래서 힘껏 밀쳐냈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지금도 꿈을 꾼단 말이지. 왜 자꾸 꿈속에 나타나는 거야. 그것도 몽설이었다고. 왜? 날 괴롭히려고? 복수하려고? 그러나 후회하진 않아. 어쩌겠어. 그리고 용서하라고 빌지도 않겠어. 부질없는 짓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결국 용서할 거야.
…… 그랬던 거야. 나는 당신이 사막으로 떠날 때마다 ‘빨리 돌아오세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너무 보고…… 꼭 돌아온다고 약속하세요. 약속을……’라고, 간절히 기도했었지.”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스스로 경계선을 그었던 거야. 정신적인 경계선을……. 그리고 그 신성불가침의 경계선을 넘은 적이 없었어. 그건 당신을 포함한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고 예의였기도 했지.”

봄비가 다시 굵은 비가 되어 내리면서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2016-05-26 10:54:49
121.xxx.xxx.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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